“1970년대 말 이래로 미국 싱크탱크(두뇌집단) 분야는 거의 전적으로 기업의 돈과 보수적인 정치 철학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어느 미국 평론가의 말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을 제외하곤 로널드 레이건에서부터 현 대통령 조지 W 부시에 이르기까지 공화당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1등 공신은 바로 싱크탱크였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최고급 인재들을 거느린 싱크탱크들은 이른바 ‘소프트 파워’로 언론ㆍ지식계 등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여론을 지배해왔다.
●여론 지배하는 소프트파워
확고한 당파성을 갖고 있지 않은 기자나 교수의 입장에선 최고급 정보, 탁월한 분석력, 시의 적절한 의제 등을 제공하는 보수 싱크탱크들의 각종 보고서와 자료들을 외면하긴 쉽지 않다.
그들은 이념을 표면에 내세울 만큼 촌스럽지 않다. ‘사실’과 ‘과학’으로 이야기해보자는 학구적 자세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런 학구성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건 친(親) 공화당 노선임에 틀림없다.
민주당 지지자들도 뒤늦게나마 무언가 깨달은 걸까? 최근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80명 이상의 친(親) 민주당 부자들이 앞으로 5년간 민주당을 지지하는 싱크탱크에 최소한 100만 달러 이상씩을 기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공화당 싱크탱크를 따라잡긴 어려울 것 같다.
공화당 싱크탱크를 지원하는 부자들은 은밀하게 큰 돈을 건네는 반면 민주당 부자들은 생색내기에 바쁘니 그 돈이나마 제대로 걷힐지 의문이다.
한국은 정치와 정책에서 싱크탱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복한 나라다. ‘바람’ 하나면 족하기 때문이다. 선거와 정책의 주요 메뉴는 혐오, 증오, 분노, 공포 등과 같은 원색적인 감정이다. 개혁파는 묵은 역사의 더러운 때를 공격하는 것만으로 재미를 보려 하고 보수파는 개혁파의 무능ㆍ편견ㆍ독선을 공격하는 것만으로 재미를 보려고 한다.
싱크탱크? 그런 것 모른다. 그건 재벌 기업들의 전유물로 간주된다. 최근 시중 은행들이 본격적인 ‘싱크탱크 키우기’에 나선 것처럼, 싱크탱크는 돈 많은 재계의 게임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권에 싱크탱크가 전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너무도 초라해서 ‘싱크탱크’라고 이름 붙일 수가 없어서 그렇지 그 비슷한 게 있긴 있다.
정치권에선 그걸 가리켜 ‘사조직’이라 부른다. 각계의 무명 엘리트들로 구성된 일종의 도박 모임이다. 자신이 가담한 사조직의 우두머리가 대권을 잡거나 그에 근접하는 권력을 갖게 될 경우 순식간에 ‘코리언 드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조직은 선거에서의 승리와 그에 따른 논공행상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싱크탱크’라고 보기 어렵다.
이른바 개혁파에겐 아예 ‘싱크탱크’라는 개념이 없다. 이들에겐 불의에 대한 분노, 약자를 위한 정의감 수준의 감정만 있을 뿐이다. 그 감정만으로 정책을 대신하려 하니 제대로 되는 일이 있을 리 없다.
노무현 정권의 일부 개혁파들이 한국 최대의 싱크탱크라 할 삼성경제연구소에 기대려고 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 비판만 할 일이 아니다. 그게 한국 정치판의 수준임을 인정하고 ‘싱크탱크 없는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국내도 초당파적 결성 절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개혁파의 싱크탱크지만, 그것만으로 끝내선 안 된다. 해방 60년 역사의 최대 교훈은 한국인에겐 당파성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져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건 갈등의 조정과 해소를 목표로 삼는 초당파적 싱크탱크다. 이건 어느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기운 미국의 ‘싱크탱크 정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갈등과 분열에 염증을 낸 나머지 화병으로 쓰러지는 부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싱크탱크는 거액 기부금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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