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1941)은 정지용(1902~1950)의 두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그보다 여섯 해 전에 첫 시집 ‘정지용시집’을 낸 바 있다.
문학교과서에 실려 그의 대표작으로 흔히 거론되는 ‘유리창 1’이나 시로서보다 가곡으로 더 잘 알려진 ‘고향’과 ‘향수’, 그리고 시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그 전문(全文)이 귀에 익숙할 ‘호수 1’(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같은 작품들은 죄다 첫 시집에 실렸다.
그러나 정지용 시학의 핵심이라 할 언어의 조형성(造形性)을 그것대로 견지하면서도 감각의 놀이를 넘어서 산인(散人)으로서의 어떤 달관을 품위 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백록담’의 경지는 ‘정지용시집’의 그것보다 윗길이라 할 만하다.
시인이 6.25동란 때 납북된 이래 1980년대 중반까지, ‘정지용시집’과 ‘백록담’은 남한의 공식 문학사에 그림자로만 어른거렸다. 30년대 한국 시문학의 좌장이자 이상(李箱)과 청록파의 문학적 후원자라는 존재의 헌걸참이 아니었다면, 남한의 냉전반공 체제는 정지용의 그림자마저 지워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해방기에 잠시 좌익 문인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정지용시집’과 ‘백록담’이 정치적 상상력과 거의 무관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시집이 남한의 독서계에서 한 세대 이상 배제돼 있었다는 것은 서글픈 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정지용시집’에서도 자연은 압도적인 미적 공간이었지만, ‘백록담’은 거의 고스란히 자연에 기대고 있다. 그 자연은 일차적으로 산이고, 흔히 그 산 속을 흐르는 물이며, 더러는 바다이기도 하다. ‘백록담’ 속에서 금강산이나 한라산 같은 명산들은 제 깊은 속살을 드러내며 독자들의 산행을 부추긴다.
산과 물의 묘사라는 점에서, ‘백록담’은 산수화첩 같기도 하다. 그것을 온전한 산수화로 만들지 않는 것은 더러 그 산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화구(畵具)를 메고 산을 첩첩(疊疊)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로 시작하는 ‘호랑나비’와 “모오닝코오트에 예장(禮裝)을 갖추고 대만물상(大萬物相)에 들어간 장년 신사가 있었다”로 시작하는 ‘예장’은 둘 다 산중(山中)의 자살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바로 이 시들에서도 보이듯, 시인이 첫 시집에서 사뭇 절제했던 산문시에 대해 크게 너그러워진 것도 두 번째 시집의 특색이다.
정지용 시의 ‘언어미술적’ 성격은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여전하다. 시인이 문학을 ‘언어미술’로 전제한 것은, 당연하면서도 여러 모로 인상적이다. 문학이 다른 무엇에 앞서 언어의 예술이라는 것을 또렷이 함으로써, 정지용은 당대의 경향(傾向)문학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 언어를 미적으로 벼리는 것은 그 언어의 담지자인 민족을 선양하는 일이기도 했다. ‘언어예술’이 아니라 굳이 ‘언어미술’이라고 한 것도 결과적으로 흥미롭다.
물론 정지용의 ‘미술’은 유럽어 Ars의 역어(譯語)로서 예술 일반을 가리켰겠지만, 요즘 용법으로 ‘미술’이 조형예술만을 가리킨다는 점을 생각하면 ‘언어미술’은 곧 정지용 시의 테두리이기도 했다.
시문학파 동료 김영랑의 시가 언어의 음악이었다면, 정지용의 시는 언어의 미술, 곧 이미지의 직조였다. 시에 대한 이 두 동인의 태도 차이는 그들의 언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김영랑이 서양외래어와 한자어를 극도로 절제하며 고유어의 교향악을 만들어냈던 데 비해, 정지용은 뉘앙스의 섬세함을 위해서라면 어휘의 본적지를 따지지 않았다.
‘백록담’에서는 ‘정지용시집’에 견주어 서양외래어보다 한자어의 노출이 또렷한 바, 이 점은 예컨대 ‘온정(溫井)’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의고(擬古) 어투와 더불어, 의연(依然)한 묘사 지향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서 모더니즘 색채를 사뭇 덜어내고 있다.
언어의 미술은 표제시 ‘백록담’에서부터 또렷하다.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진(星辰)처럼 난만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 자리에서 걋?옮긴다”로 이어지는 도입부에서, 산을 오를수록 꽃의 키가 점점 작아져 마침내 바닥에 박힌 꽃무늬처럼, 별처럼 보이다가 저녁이 돼 그 별들이 고스란히 하늘로 옮겨가는 듯한 정경이 눈으로 보는 듯 실감난다.
이 시행들을 앞에서, 나는 문득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싶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산 풍경을 섬교하게 묘사한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바람.// 앞섰거니 하여/ 꼬리 치날리어 세우고,// 종종다리 까칠한/ 산새 걸음걸이”(‘비’) 같은 시행도 기억할 만하다.
시인은 더러, 이미지의 순간적 정태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동사의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기본형을 사용하기도 한다. “꽃 옆에 자고/ 이는 구름,/ 바람에 아시우다.”(‘비로봉’)의 ‘아시우다’(‘앗기다’의 방언)나, “바람에 별도 쓸리다.”(‘별’)의 ‘쓸리다’가 그 예다.
주체가 객체 또는 상황보어와 자리를 바꾸어 상투성을 피한 표현도 눈에 띈다. ‘인동차(忍冬茶)’라는 시의 첫 연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이 나린다” 같은 대목이 그렇다.
이 행을 일상언어 그대로 “노주인은/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을 마신다”라고 했다면 얼마나 밋밋했을 것인가. “물도 젖여지지 않어/ 흰 돌 우에 따로 구르고,// 닥어 스미는 향기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옥류동’) 같은 시행들에서는 감각의 시인이라는 정지용의 명성이 실팍하다.
이제 낯빛을 바꾸자. “생김생김이 피아노보담 낫다./ 얼마나 뛰어난 연미복 맵시냐.// 산뜻한 이 신사를 아스팔트 위로 곤돌라인 듯/ 몰고들 다니길래 하도 딱하길래 하루 청해왔다”로 시작하는 ‘유선애상(流線哀傷)’은 그 묘사 대상이 무엇이냐를 놓고 전문적 시 독자들 사이에도 적잖은 논란이 있었다.
‘오리’라는 견해도 있었고 ‘자동차’라는 견해도 있었고 ‘담배파이프’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권영민이 제출한 ‘자전거’라는 견해가 제일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의 ‘연미복 신사’가 자전거든 아니든, 이런 논란 자체는 ‘유선애상’이 형상화가 덜 된, 미숙한 작품임을 드러낸다.
‘시 읽기의 고통스러움과 즐거움’이니 ‘놀라운 상상력의 비약’이니 하는 허풍으로 습작에 가까운 작품을 떠받들 일이 아니다. 그리고 ‘유선애상’의 이 미숙함은 정지용 시 세계 전반에 대해 어떤 시사점을 제공한다.
위에서도 적었듯, 정지용은 30년대 한국 시문학의 좌장이자 멘토르였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의 해금 이래, 그의 이름은 다시 한국문학의 ‘오피셜 스토리’에 가장 굵은 글씨로 기록되고 있다.
많은 시인들이 ‘정지용시집’이나 ‘백록담’을 신문학 최고의 성과로 꼽는다. 그러나 정지용이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은 역사의 원근법을 고려할 때만, 그것도 매우 너그럽게 고려할 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시는 그의 말대로 언어미술이다. 그래서 그가, 자신이 마음 속 깊이 경멸했을 임화나 그 주변의 ‘정치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정치시들을 배제한 ‘언어미술’로서의 시적 공간만을 놓고 보더라도, 정지용의 자리는 지나치게 격상돼 있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언어미술’의 ‘미술’을 음악까지 포함한 ‘예술’로 해석했을 때, 정지용은 그보다 10여 년 손아래인 미당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아니, 동갑내기지만 문학 활동은 꽤 일렀던 소월에게도 그는 끝내 미치지 못한다.
‘언어미술’의 ‘미술’을 요즘 용법대로 조형예술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는 60년대 이후의 모더니스트들, 예컨대 오규원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 정지용을 ‘감각의 시인’으로서 훌쩍 뛰어넘어선 언어미술가들도 우리 둘레에 적지 않다. 그것은 한국어가 근대적 문학언어로서 살아온 한 세기 동안에, 이 언어가 워낙 빨리 진화한 탓도 있다.
그 진화의 중요한 측면이 정교화였던 만큼, 정지용이 후배 시인들의 벽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지용 신화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은, 더구나 그 신화의 그림자가 시인과 비평가를 포함한 전문적 시 독자들에게까지 드리워져 있는 것은, 확립된 권위에 대한 추종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정지용 신화는 예컨대 임화 신화와 방향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허나, 그렇잖아도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 한 시인의 신화에 구태여 딴죽을 거는 내 심술은 또 얼마나 볼썽사나운가?
▲ 구성동(九城洞)
골짝에는 흔히
유성(流星)이 묻힌다.
황혼에
누리가 소란히 쌓이기도 하고,
꽃도
귀양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山)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간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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