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있는 부처에 알아서 기어야…"
감사원에 근무하는 A씨는 최근 한 기초자치단체 감사를 나갔다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기초단체 직원이 “수고하시는데 식사나 하시라”며 흰 봉투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A씨는 “그 자리에서 거절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일부 하급기관에서 상급기관에 대한 촌지 관행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씁쓸했다”고 말했다.
김세호 전 건설교통부 차관이 철도청장 재직 시절 상급기관 고위 인사들에게 수십만~수백만원의 촌지를 준 것으로 드러나 이른바 ‘관_관 접대’ 실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관계자들은 “과거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면서도 “없어졌다”는 말은 선뜻 하지 못했다.
관관 접대 실태 관 사이의 접대는 어떤 기관이 우월한 지위에 있느냐에 따라 접대 방향이 정해진다. 중앙 부처의 모 국장은 “조직(행자부) 예산(기획예산처) 인사(중앙인사위원회) 조정(국무조정실) 등 권한을 갖고 있는 기관이 우위에 서게 마련 아니냐”며 “예부터 ‘신발 닳는 만큼 예산이 내려온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들어 이런 관행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수혜기관에서 식사 정도는 대접하곤 한다”고 전했다. 이런 접대는 식사 수준을 곧잘 넘어서기도 한다. 다른 부처의 한 간부는 “일부 기관에서는 지금도 ‘밥을 사면 술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이라며 노골적인 접대 요구가 아직 남아 있음을 시인했다.
중앙 부처의 경우 원활한 국회 업무를 위해 국회 전문위원실을 찾아가 식사를 대접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부처장이 국회의원 개인 후원회를 통해 개인 자금으로 기부해 편법으로 눈도장을 찍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접대 관행은 기초단체 등 하위로 내려갈수록 더욱 빈번하다. 충남의 한 시장은 지난해 설을 전후해 검찰 경찰 등 힘 있는 기관에 떡값과 전별금 명목으로 700여만원을 제공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대구시는 지난해 5월 일본으로 연수를 떠난 시의원들에게 680만원의 격려비를 기관운영업무추진비(판공비)로 준 사실이 알려져 비난을 받기도 했다.
힘 있는 기관에 ‘알아서 기어야 하는’ 이른바 노력 봉사 행태도 여전하다. 해외 공관에서는 청와대 등 힘 있는 곳의 간부가 출장 올 경우 관광 안내 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접대비 변칙 조달 실태 관관 접대에 쓰이는 자금은 그 성격상 떳떳한 곳에서 조달할 수 없다. 때문에 각급 기관은 용처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판공비, 직원 사기진작용으로 책정된 ‘정원가산금’ 등을 전용해 재원을 마련한다. 기관장 비서실에 각종 운영비 명목으로 지급되는 돈을 갖다 쓰기도 한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공관 예산을 과다 책정한 뒤 이를 본부에서 전용하거나 환율 차이에 따라 생긴 돈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1년 중국 주재 총영사와 영사가 외교활동비를 지출한 것처럼 꾸며 본부 담당자에게 떡값을 상납한 사건이 적발된 바 있다. 여전히 비자금 조성 관행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일부 시ㆍ도에서는 주거래은행 등으로부터 의회 심의가 필요 없는 협력사업비 명목으로 돈을 받아 이를 비공개적으로 운용하고 있어 접대비 지출 등의 의혹을 사고 있다.
시민단체 반응 시민단체들은 판공비의 불투명한 사용내역을 검증할 수 있도록 투명한 감시 시스템을 마련해야 관관 접대 등의 관행을 근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실련은 “고위공직자들이 아직도 업무추진이라는 애매한 명목으로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은 채 ‘눈먼 돈’ 쓰듯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김 전 차관 사건으로 확인됐다”며 “판공비의 규모와 용처를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참여연대 이재명 투명사회국장은 “기관장의 사적 이익을 위해 판공비라는 명목으로 예산을 횡령하는 경우가 허다한 만큼 판공비 유용 실태에 대한 본격 수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창수 예산감시국장은 “판공비라는 이름으로 본래 용도와 무관하게 예산을 전용하거나 유용하는 관행은 결산만 제대로 하면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며 “요식행위로 진행되고 있는 예산 결산을 철저히 해 부도덕한 판공비 유용 관행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
송영웅기자 herosong@hk.co.kr
■ 감시 할 '눈'이 없다
시민단체가 ‘판공비 사용내역을 공개하라’고 서울시를 상대로 제기한 정보공개 소송에서 대법원은 지난해 6월 “서울시는 판공비 내역 3만 9,000쪽을 직접 복사해주라”고 판결했다.
이처럼 판공비가 사용된 장소와 대상까지 낱낱이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례에도 불구하고 정부 부처의 판공비 편법사용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제도적 허점이 많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우선 시민단체 등이 제기하는 판공비 내역 공개 소송이 해당 지역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집중돼, 정부 부처들을 감시할 ‘날카로운 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지방 선거 등에서 선심용으로 뿌려진 지자체 판공비 문제는 집중 거론돼왔지만, 중앙 부처나 산하 기관들이 예산을 전용해 서로서로 관ㆍ관 접대용으로 준 경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판공비나 판공비로 전용한 기타 예산의 사용처를 허위로 기재할 경우 사실상 적발이 불가능하다. 김세호 전 건설교통부 차관은 판공비 등을 고위층 챙기기에 쓰면서 예산 집행내역에는 부하직원 격려에 쓴 것처럼 허위 기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철도청(현 철도공사) 유전개발 의혹사건 수사가 없었다면 이 같은 사실은 밝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증빙서류를 첨부하도록 독려하고는 있지만 10만~20만원 단위로 수없이 쪼개져 지출되는 판공비 내역을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판공비 편법 사용은 비윤리성에 비해 형사적 처벌 잣대가 마땅치 않다는 것도 문제다. 검찰 관계자는 “판공비에 관한 별도의 법이 없어 형법상 횡령 외에 적용할 법규가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횡령 혐의의 처벌은 액수가 가장 큰 기준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액인 판공비 오용을 처벌하는 경우는 드물다.
실제 최근 법원은 허신행 전 농림수산부 장관이 서울시농수산물공사 사장 시절 사업비를 과다 계상해 2,000여 만원을 조성한 후 정치인 경조사비 등에 366만원 가량을 편법 사용한 혐의(횡령)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액수가 부당하게 과도하지 않는 한 업무추진비를 둔 취지에 어긋나게 사용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 '깨끗해진' 일본
‘관_관접대’(官官接待)란 말은 원래 일본에서 나온 것이다.
1995년부터 일본서 회자됐던 이 신조어는 지방 공무원들이 유리한 조건으로 예산이나 보조금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관청 관료에게 향응을 베푸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시민단체와 언론들은 정보공개 조례를 이용, 지방자치단체의 공금사용 실태를 조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뿌리깊은 ‘관_관접대’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조사에 따르면 지자체들은 주로 ‘식량비’항목의 예산을 접대비로 사용했는데, 이중 연간 300억엔(약 2,900억원)에 달하는 지자체의 공금이 중앙관료 접대에 쓰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의 가짜 출장이나 회식 등 공무원들의 어이없는 공금 유용 행각도 발각돼 국민들의 공분을 사며 엄청난 사회문제로 발전하게 됐다.
시민단체와 언론들은 ‘관_관접대’의 실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이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했고, 일본 정부와 지자체들도 제도적인 개선책을 내놓는 등 대대적인 수습에 나서 현재는 이 말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개선된 상태이다.
시민단체인 ‘전국 시민 옴부스맨’의 조사에 따르면 ‘관_관접대’가 이루어졌던 지자체의 ‘식량비’는 1995년 평균 3억8,800만엔에서 2003년 8,700만엔으로 격감했다. 도호쿠(東北)지방의 이바라키(茨城)현의 경우는 93.3%가 삭감돼 관_관접대의 싹을 아예 없애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지자체장 등의 교제비도 같은 95년 평균 2,380만엔에서 2003년 1,170만엔으로, 51% 삭감되는 등 공금 남용의 여지가 줄어들었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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