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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민주화운동 인정/ "폭도 누명…사반세기 심적고통 이제야 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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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민주화운동 인정/ "폭도 누명…사반세기 심적고통 이제야 털어"

입력
2005.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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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시커멓게 묻은 탄 먼지를 깨끗이 씻은 기분입니다.”

무려 사반세기가 걸렸다. 이원갑(66ㆍ강원 정선군 고한읍)씨는 16일 점심 숟가락도 놓고 그 의미를 설명하느라 벅찼다. “우리는 무지막지한 광부들이 아니었습니다. 폭도도 아니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 쳤을 뿐입니다.”

국무총리 소속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회는 최근 1980년 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인 사북 노동항쟁 당시 항쟁지도부였던 이씨와 신경(64)씨 등 2명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했다. 명예회복을 신청한 지 5년 만이다.

이씨는 한숨 크게 몰아 쉬고 말을 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할 때였어요. 다 숨죽였지만 우리는 무식하고 못 배워서 그런지 용기가 있었어요. 먹고 살게만 해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런 우리를 사람취급하긴커녕 갖은 폭력과 고문으로 짓밟았습니다.”

80년 4월21일 당시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강원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광부와 가족 6,000여명이 들고 일어났다. 적은 폭의 임금인상을 회사 측과 담합하고 부정선거를 일삼던 당시 노조지부장의 사퇴를 요구하기 위해 모인 광부 중 몇 명을 경찰차가 치고 달아난 것이 사북 노동항쟁의 발단이었다.

당시 광부들의 생활은 처절했다. 월급은 16만원(현재 가치로 41만원)으로 4인 가족 최저임금에도 못 미쳤고 지하 막장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이씨는 노조지부장에 대한 집단린치 등은 당시 광부들의 저항을 “한 맺힌 분풀이”라고 회고했다.

같은 해 4월24일 이씨 등의 노력으로 11개항의 협상안이 타결됐지만 계엄사령부는 이씨 등 주모자 81명을 계엄령포고령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리고 이어진 살인적인 수사는 아직도 고문후유증으로 남아 있다.

후유증은 이뿐만 아니었다. “실형을 받고 나오니 취직할 곳이 없었어요. 막노동을 전전하며 9남매를 키웠죠. 남들이 욕하는 거야 무시한다 쳐도 ‘폭도 아버지 때문에 대학에 못 갔다’는 자식들 얘기를 들으면 울화가 치밀어요.”

그래서 명예회복을 위한 일에 앞장섰다. 살기도 팍팍한 판에 2000년 사북 노동항쟁 명예회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가장 먼저 동지 2명과 함께 명예회복 신청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뒤를 따라 지난해까지 17명이 명예회복을 신청했다.

열매는 맺었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함께 명예회복을 신청했던 조행웅씨는 지난해 12월 고문후유증으로 숨졌다. 이 때문에 조씨는 명예회복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씨는 “자기는 못 볼 것 같으니 꼭 명예회복해서 무덤에 찾아오라고 했는데…”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 동안 고문후유증과 세상의 손가락질에 시달리다 숨진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 사람들 명예도 회복해 줘야죠. 보상도 이뤄져야 하고요.” 이씨는 아직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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