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대기업 노조를 상대로 기득권 포기를 요구하고 나선 데 대해 재계가 ‘올바른 문제 인식’이라며 환영하고 나선 반면 노조는 ‘본말이 전도됐다’고 반발하는 등 노사간 입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광복 60주년 기념사를 통해 경제ㆍ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관련, “막강한 조직력으로 강력한 고용보호를 받고 있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기업이 어려움에 처해도 정리해고가 어려운 제도 아래서는 비정규직과 대다수 노동자가 오히려 피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재계는 이에 대해 16일 일제히 환영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상무는 “지금처럼 정규직의 과보호로 인해 경기가 안 좋거나 기업 사정이 어려울 때에도 정리해고 등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 기업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상무는 이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대기업 노조의 기득권 표기를 요구하고 나선 노 대통령의 문제 인식은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기업 노조와 노동계에서는 이날 ‘어이가 없다’며 반발했다. 장규호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공보부장은 “노 대통령의 기념사가 나간 뒤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라는 조합원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며 “먹고 살기 위해 밤잠도 안 자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과연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얘기인 지 의문스럽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 노조원은 게시판에 “대통령은 노조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물가를 잡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라며 “물가만 안 오른다면 우리도 임금 인상 요구를 안 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대 노총도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라며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성명서를 통해 “한국의 노사관계가 선진화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노조가 아니라) 한국 경제의 암덩어리인 재벌구조부터 해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도 “정규직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은 책임 회피”라며 “경제 양극화의 원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중적 경제구조와 원ㆍ하청간 불공정 거래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의 대기업 노조 기득권 포기론이 여론의 공감을 받는 것임에도 불구, 최근 불거지기 시작한 노사간 임ㆍ단협 협상에 악재로 작용하고, 노ㆍ정 대립에도 부정적인 미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발언이 공허한 선언으로 그치지 말고,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문제의 핵심을 파악한 것은 사실이나 이미 정치세력화한 대기업 노조가 이러한 문제를 쟁점화하면서 산업 현장이 더욱 정치 선동의 장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노 대통령의 언급은 정부가 더 이상 대기업 노조의 법과 원칙에 어긋난 행위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며 “무원칙한 노동정책을 바로잡고 실정법과 원칙들을 절대 훼손하지 않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준모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도 “대기업 노조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 시장 양극화를 유발하는 문제의 진원지라는 판단이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또 “단체협약 등을 통해 강력한 고용 안전판을 갖고 있는 대기업 노조가 대통령이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해서 포기할 리 만무하다는 점에서 어떤 실천 프로그램으로 이를 관철시킬 것인지에 대한 노ㆍ사ㆍ정간 대타협을 통한 실사구시적인 구체적인 방안들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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