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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반도기에 대한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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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한반도기에 대한 소회

입력
2005.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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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이맘 때 태극기를 바라보던 이들의 눈길이야 오죽 순정 했으랴. 그러나 이후 굴곡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태극기는 기념일이나 행사 때 소도구 정도로 전락했다.

오랜 권위주의 시대에 획일화하고 강요된 애국심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드렁하게 대접 받던 태극기가 돌연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현 정권 들어 사회갈등이 폭발하면서 태극기에는 보수의 낡은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무리 시청건물을 태극기로 휘감았어도 확실히 광복60주년 행사기간 내내 한반도기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뜻밖의 국립현충원 참배로 북한대표단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화합의 통일축구 잔치판이 벌어지는 판에 태극기를 휘둘러대는 일은 왠지 생각없는 짓거리처럼 보일 정도였다.

1883년 국기로 제정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애환을 함께 해온 태극기가 겨우 10여년 된 한반도기의 젊은 위세에 물러앉은 느낌이라면 지나칠까?

한반도기는 1991년 일본 지바(千葉)현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당시 남북단일팀의 깃발로 급조된 것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폐막식에서 남북공동입장 때 사용된 이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유니버시아드 등 대규모 국제스포츠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밀어내고 통일한국의 상징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반도기가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반도기로 상징되는 낭만적, 혹은 추상적 통일인식이 남북의 상이한 현실을 망각케 함으로써 도리어 통일행보를 지연하고 왜곡할 가능성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흰 바탕에 푸른색 지도만 덜렁 앉힌 이 몰(沒)디자인감각의 깃발이 주는 느낌은 모든 차이를 묻어버린 ‘그저 막연한 하나’다. 십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우리는 하나” “한 민족, 한 핏줄” 따위의 매양 똑같은 대사에 머물러있는 현실의 답답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역사적 성과이긴 하지만, 사실 거기에 담긴 자주적 통일과 민족화합 정신은 30년 전인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표방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을 거의 그대로 재론한 것이다.

더욱이 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는 남북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한 모든 원칙이 완성돼 있다. 그러고도 그토록 긴 세월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는 상황은 적어도 남북관계에 관한한 ‘가슴 벅찬 동포애’ 등의 정서적 수사(修辭)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합과 통일은 서로의 차이를 애써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인식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차이를 극복키 위한 준비없는 통일 운위는 무책임한 위선이다.

통독 이후 구(舊)동.서독 국민 간의 적대적 감정이 갈수록 심화하는 현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여년 전 온 국민을 울렸던 상봉 이산가족들이 그 뒤 도리어 남 이상 멀어진 사례들도 숱하지 않았던가. 친혈육조차 고작 20~30년의 생활차이를 극복하기가 이토록 힘들진대, 하물며 벌써 60년을 극단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남북 사이에서랴.

한반도기는 일견 감동적이긴 하나 자칫 엄연한 현실문제를 뭉개고 보지 못하게 하는 위험성을 갖는다. 정말로 통일을 원하고, 또 감당코자 한다면 벌써부터 깃발 속 ‘하나된 한반도’ 모습에 마냥 도취해있을 일만은 아니다.

이준희 문화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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