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기 훼손을 한다거나 소각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 정부가 관대하게 대할 때는 지났다”. 얼마 전 8ㆍ15기념 남북공동행사와 관련해 이해찬 총리가 일부 극우단체들의 불법행위에 엄정 대처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하며 했다는 말이다. 어제가 광복 60주년이 되는 광복절이었지만 이 말처럼 지난 60년간의 우리 사회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극우 반공체제 아래서 심심하면 반관제데모에 의한 김일성 화형식을 보아 왔는데 이제 정부가 나서서 북한국기를 훼손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나서니, 세상이 바뀌긴 정말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일면에 불과하고 아직 바뀌지 않은 것도 많다. 광복 60주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고 한총련 관계자들을 비롯한 양심수들은 아직도 창살 뒤에 갇혀 있다. 인공기를 훼손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엄포와 국가보안법이라는 너무도 모순적인 두 현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복 60주년의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광복 60주년의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남북공동행사도, 국가보안법도 아니고, 국가정보원의 도청을 둘러싼 도청게이트이다. 사실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터져 나온 삼성관련 도청테이프는 광복 60년이 지난 한국사회가 어떠한 사회인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정ㆍ경ㆍ언 유차구조 드러나
즉, 정치권, 재벌, 일부 주류언론 간의 정, 경, 언의 삼각유착구조라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숨겨진 심층구조를 폭로해줬다. 어떻게 보면, 애국가 가사처럼 하느님이 보우하사, 삼각유착구조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청산하라고 광복 60주년 기념선물로 도청게이트를 선물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검찰의 수사와 언론의 보도가 이 같은 삼각유착구조보다는 불법도청에 맞춰지면서 주요 쟁점은 불법도청으로 흘러가고 있다. 게다가 과거청산의 차원에서 국정원이 김대중 정부시절에도 불법도청을 했다는 고해성사를 하면서 엉뚱하게도 사태는 노무현 정부와 김대중 전대통령 진영간의 갈등의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동교동 측이 도청의 몸통은 김영삼 정권인데 노무현 정부가 쓸데없이 자기들 시절의 도청사실을 고백하고 나서 화살이 자기들에게 옮겨오게 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설사 도청규모가 김영삼 정권보다 작았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몰랐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정부 하에서 일어난 일인만큼 노 대통령 측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기에 앞서 국민들에게 백배 사죄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사실 타이밍이 옳았는가는 논쟁이 가능하지만 노 대통령이 잘 설명했듯이 이 문제는 숨길 것이 아니라 고백하고 털고 가야 했던 문제이다. 다만 노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미리 김 전대통령에게 전화를 해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DJ측, 도청문제 사과를
또 김 전대통령 측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최근의 도청 게이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작동하고 있다. 우선, 김 전대통령은 도청 등의 최대 피해자이고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만큼 국민들은 김영삼 정부에 비해 더 엄격한 도덕성을 기대해 왔고 그만큼 도청사실과 관련해 실망감도 크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불법도청이 폭로된 과정의 차이이다. 김영삼 정권의 불법도청의 경우 삼성관련 테이프가 폭로되면서 터져 나왔다. 핵 폭풍 급의 충격적인 내용이 폭로되면서 사람들의 초점은 도청 사실에 집중되기 보다는 최소한 도청사실과 도청내용으로 분산되거나 아예 도청내용으로 집중되어 도청사실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의 도청문제는 도청내용은 전혀 나타나지 않은 채 도청사실만 밝혀짐으로써 모든 초점이 도청사실에 집중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도청내용을 공개해 관심을 내용쪽으로 분산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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