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평화헌법’의 울타리 안에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은 최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도전하는 등 정치 대국화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반성을 생략한 채 밀어붙인 ‘야심찬’ 도전은 한국과 중국 등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 무산될 운명에 처해 있다. 종전 60년을 맞은 일본의 쓸쓸한 자화상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보수ㆍ우경화를 지켜보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내재된 군국주의의 망령을 되살리려 하는 우경화는 아시아와의 불화를 심화시키는 등 일본의 전도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다카하시 데츠야(高橋哲哉) 도쿄(東京)대 교수는 “일본의 우경화는 가장 중요한 민주적 가치인 ‘정신적 자유’를 위기에 빠뜨린다”고 비판하며 “오랜 기간 투쟁을 거쳐 자유를 획득한 한국과 일본은 민주적 연대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급속한 우경화는 한일 국교정상화 40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에 역사교과서 왜곡,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독도 문제 등을 한꺼번에 폭발 시키는 동력이 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강행은 일본 국내에서도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게이오(慶應)대 교수는 “무기와 유품 등을 전시한 야스쿠니 신사의 군사박물관 유슈칸(遊就館)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존자위의 전쟁이었다’고 정당화하고 있다”며 “고이즈미 총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야스쿠니 논쟁에서는 A급 전범이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당당하게 제기되는 등 전전(戰前) 일본의 군국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언동이 잇따랐다. 재일동포 강상중(姜尙中) 도쿄대 교수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은 야스쿠니 문제를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간주하고 있다”며 “해결책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 시절 부상했던 무종교 추도시설을 만드는 것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원흉은 미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야스쿠니의 역사 인식은 극우 단체인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 집필한 후쇼샤(扶桑社) 교과서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일본의 극우ㆍ보수 세력은 전후 ‘망언’이라는 제한된 수단에 의존해 오다가 결국 역사 교과서라는 확실한 발판을 마련, ‘역사 되돌리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 레이타쿠(麗澤)대 교수는 “일본은 급속한 경제 발전의 길로 접어들자 아시아를 외면했다”며 “이 과정에서 ‘평화헌법 하의 일본은 어느 나라도 침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돌아 볼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역사 인식에 공백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그는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다케시마(竹島)는 (일본이 주장하는) 영토문제가 아니라 역사문제”라며 “한국합병의 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만들었다고 하는 ‘역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ㆍ1878~1967) 총리는 ‘재생 일본’을 구호로 내세우며 패전국 일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재생 일본’이란 단어에는 ‘전쟁 전 일본이 추구한 국가 목표가 타당하고, 그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전후 60주년의 길목에서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일본은 이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확인해줘야 할 것이다. ‘재생 일본’은 ‘군국주의의 재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正男ㆍ1914~96)는 “일본에서는 ‘와’(和)라는 이름으로 강제가 이루어진다”며 일본의 집요한 전체주의적 속성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또 보편적인 교리와 사상도 일본에 전래되면 바로 ‘일본화’돼 이상하게 변용돼 버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후 60년을 맞는 오늘 일본이 버려야 할 것은 평화를 추구하는 인류 보편의 정서를 마음대로 뒤틀어버리는 바로 이런 특유의 폐쇄적 속성들이다.
도쿄=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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