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홧병이 도청 급류타기를 즐기던 집권세력에 암초로 떠오른 모양이다. 그의 와병(臥病)에 호남 민심이 들끓자 DJ와 호남 유권자들의 노여움을 풀기위해 부산하다고 한다.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나 싶고, YS가 몸 져 누우면 어찌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YS야 도청 질문에 태연하게 딴전 피울 만치 원래 심신이 튼튼한 양반이니 공연한 걱정일 수 있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민정서가 크게 차이 나고, 도청 파문에 연루된 경위도 다르니 비교 자체가 부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음모론에 관심 두지 않더라도 집권세력의 행태는 볼썽 사납다. 당초 국정원이 DJ 집권시절에도 도청이 자행됐다고 털어놓자 일제히 진상을 철저히 밝히라고 떠드는 것에서 염량세태를 새삼 느꼈다. 아무리 권력과 시류를 좇는데 약삭빠르다지만, 그토록 떠받들던 DJ의 수모는 아랑곳 않는 모습이 오히려 진정성을 의심하게 했다.
그 시절 권력과 한 배를 탔던 이들이라면, 먼저 스스로 부끄럽고 민망하게 여겨야 마땅하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이걸 외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도리가 아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국가가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몰래 짓밟는 도청범죄를 자행한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도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다. 이는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다.
그렇다면 호남 민심과 친 DJ 정서가 들끓는다고 갑자기 태도와 말을 바꿔 온갖 변명과 아첨을 할 일이 아니다. 경박한 언행으로 인권대통령의 신망과 명예를 손상시킨 것은 사죄해야 마땅하지만, 진상은 엄정하게 가리겠다고 다짐해야 옳을 것이다. DJ도 당연히 그 것을 바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보면, DJ의 와병은 도청 급류에 휩쓸려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사회 전체가 정신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을 만 하다. 세월의 이끼 끼고 풍화한 DJ의 너른 바위 끝이나마 붙잡고, 과거를 오늘 어떻게 인식하고 정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인가를 차분하게 생각하기 바라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둘러싼 강파른 논쟁은 DJ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많은 이들에게 울화를 안겼다. 진정성도 지혜도 엿보이지 않는 정치세력의 여론 급류타기에 휩쓸려 홧병을 자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각기 어떤 명분을 지지하든 간에, 사회가 함께 병 드는 것은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