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돈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스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이 시가 전하는 슬픈 무능(혹은 서글픈 돈)의 다양한 비유들은, 시적 화자의 ‘마누라’ 입장에서야 달리 느껴질 지 모르나, 넋 놓게 하는 기진의 슬픔은 아니다.
오히려 백석이 어떤 시에서 썼던 것처럼 ‘따사로이 가난’한, 슬픔이다. 그 온기를 보온하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 같은’ 푸근한 서글픔이 장석남 시인의 다섯 번 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발행)의 주된 정조라면 지나친 억지일까.
위의 시가 시집 전체를 아우르며 그의 시적 미학을 지탱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 게 바위도 되고/…/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새로 생긴 저녁’) 처럼 느리게 승부하고, “…안팎을 다해서 저렇게 깨어진 뒤라야 완성이라는 것이, 위안인, 아침이었다…”(‘석류(石榴)나무 곁을 지날 때는’)며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을 생각’하는 독한 시인이다.
그 같은 시적 긴장에 비춰 ‘목돈’의 풀린 사유는, 그로서는, 가벼운 일탈인 듯도 하지만, 뭐 어떤가. 그 ‘황홀한 방황’도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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