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처조카이자 6공 당시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은 11일 발간한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_5공ㆍ6공ㆍ3김시대의 정치비사’에서 5공 청산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갈등, 중간평가 유보, 3당 합당 막전 막후를 상세히 묘사했다. 박 전 의원은 “80년 5공 때부터 DJ정부에 이르기까지 20년간 겪었던 일들을 기록해둔 20여권의 다이어리와 120여권의 수첩, 방대한 사진 등을 토대로 회고록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회고록에 나오는 주요 비화의 요약.
■ 5공청산 공방(1988년)-전두환씨 "폭탄선언 하겠다" 저항
5공 청문회 시작 6일 뒤인 11월 8일, 전두환 전대통령이 나를 보자고 했다. 분노에 찼다. “재산헌납 낙향이야기가 민정당 고위층에서 나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
이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측은 폭탄선언을 준비하는 등 최후의 저항도 준비했다. 87년 대선을 위해 정치자금을 모은 과정과 인수인계가 주된 내용이었다. 전 전 대통령측은 “독자 발표하겠다”고 했다. “이순자 여사께서 발표문안을 2차 독회하고 있다”는 으름장도 놓았다. 우리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폭탄선언을 한다면 여권 전체가 치명상을 입을 것이 기 때문이었다.
11월15일 노 대통령은 자신이 이른 시일 내 전 전대통령을 만나 사태를 매듭짓기로 했다. 그리고 이날 밤 전 전 대통령과 40분간 전화통화를 했다. 전 전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나중에 만날 때마다 술이나 한잔 주시오”였다고 한다. 11월23일 전은 TV로 생중계 되는 가운데 대국민사과를 발표하고 백담사로 향했다. 전이 대국민사과문을 읽는 것을 보며 노 대통령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 중간평가 유보(1989년)-유보성명서 작성 YS가 조언
중간평가는 그야말로 사족이었다. 취소하자니 자존심 상했고 강행하자니 극심한 대립이 우려됐다. 강행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었다. 1월28일 이종찬 총장이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격노, 이 총장을 강하게 질책했다.
3월4일 야3당 총재들은 중간평가는 국민신임 투표형식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나는 그 해 3월 월계수 총동원령을 내려 국민투표에 대비했다. 3월 7일 저녁 노 대통령은 JP와의 단독회동에서 중간평가로 정국이 극한 상황까지 치닫지 않도록 하자고 합의했다.
10일 DJ와 대통령은 세시간 넘게 회동했다. DJ는 “5공청산 후 중간평가가 바람직하다. 하지만 신임을 내건 국민투표는 위헌 아닌가”라고 했다. 야당 총재들은 대통령을 만나면 신임 중간평가를 반대해놓고는 막상 밖에서는 옥외 집회를 계속하고 있었다.
3월15일 민정당은 중간평가를 신임투표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3월16일 밤 10시 상도동 YS자택 2층 서재에서 단둘이 마주 앉았다.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했고,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합당에 대해서도 사실상 합의했다. YS는 중간평가 유보 성명서를 작성할 때 참고하라고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양당의 합당명분을 위해 발표하기 전에 5공 청산의 마무리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3월20일 청와대 당정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중간평가 연기를 발표한다.
■3당 통합(1989~90년)-정계개편 제안하자 DJ는 거부
89년5월30일, 상도동에서 YS를 만나 보수대연합을 설명했다. 20억원과 2만달러도 전달했다. 언젠가 진실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수표 번호 등 돈 출처를 메모해두었다.
6월28일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DJ에게 의혹의 시선이 쏟아졌다. YS는 활기를 되찾았다. 제1야당 총재인 DJ를 무력화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듯하다. 9월4일 YS는 올해 말까지 5공청산이 안되면 대통령 탄핵소추를 준비하겠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럭비공 YS지만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김덕룡이 찾아와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 해 12월31일 전 전대통령이 국회에 섰다. 극도로 흥분한 민주당 노무현 의원이 단상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졌다. 우리는 돌발사태를 우려, YS에게 노 의원 교체를 요청했다. 그러나 YS는 자신의 선명성에 문제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1월11일 대통령과 DJ의 단독회동이 있었다. 정계개편 문제를 꺼내자 DJ는 “4당 체제 이대로 잘하면 위대한 대통령이 된다”며 거부했다. 19, 22일 민주당, 공화당과 별도로 각각 합의각서에 서명했다. 당시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기 때문에 YS, JP도 같은 배를 탈 줄은 몰랐다. YS는 JP의 합류얘기를 듣자 “그런 걸 끼워 넣어 모양이 괜찮겠느냐. 들러리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1월22일 노 대통령 YS JP는 청와대에서 회동에 들어갔다. 9시간 마라톤 회동을 하면서 고뇌 끝 구국의 결단을 하는 모양을 갖췄다. 내가 미리 준비한 일정대로였다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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