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부회장이 9일 검찰에 소환됐다. 최근 '안기부 X파일'에서 홍석현 주미대사와 함께 정치자금 제공을 협의한 사실이 드러나 시민단체로부터 고발 당했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삼성의 2인자,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에 대한 두 번째 검찰 소환 조사다. 삼성으로서는 이 회장의 고려대 명예박사학위 파동에 이은 그룹 차원의 악재다.
민주노동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민단체와 공정거래위원회 열린우리당 등으로 삼성에 대한 전선(戰線)이 확대되고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최근에는 참여연대가 90년대 이후 삼성에 영입된 고위공직자·법조인·학자·언론인 278명의 명단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삼성이 행정·사법·학계 등에 형성된 인맥을 활용해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게 보고서의 요지다. ‘삼성 공화국’을 견제하지 못하면 한국사회의 민주 질서와 경제 활력이 심각한 위협을 맞게 된다는 주장이다. 가히 삼성 타도 의 북소리가 끊이지 않는 사면초가의 국면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재벌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대표 기업격인 삼성에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중압감을 호소할 정도다. 삼성의 중견 간부도 “국가경제와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도 왜 이렇게 비판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외부에서 삼성을 보는 시각과 삼성맨 들의 시각차는 이처럼 크고 접점을 찾기 어렵다. 이건희 회장이 기부금을 내고 명예 박사 학위를 얻은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 삼성인들은 고대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인 것 뿐이라고 말한다.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문제로 헌법소원을 내는 등 정부와 '맞장'을 뜰 정도로 많이 컸다는 일각의 비아냥에 대해서도 외국인 지분으로부터 회사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일축한다.
언론사 사주와 함께 거액의 정치자금으로 대통령후보를 매수하려 했다는 비난에도 ‘오히려 삼성이 불법 도청의 피해자’라고 빠져 나간다. 핵심 관료 출신 인사들을 영입, 로비스트로 활용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글로벌 비즈니스를 뒷받침 하기 위한 장기 포석이라는 논리를 편다.
문제는 그 자체로 완벽한 논리를 구성하고 있는 삼성의 ‘모범 답안’이 오히려 화를 부른다는 데 있다.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왠지 수긍할 수 없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삼성 제일주의에 대한 반감이다. 민초들의 소박한 의견을 타박하는 듯한, 결벽증이 묻어나오는 특유의 엘리트주의가 '안티 삼성'의 분위기를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는 얘기다.
’삼성 공화국’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도 본연의 업무인 기업에서의 일등주의를 전 분야로 확대하려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스포츠 분야에서조차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수 선수를 싹쓸이해가는 삼성의 일류 강박증이 없던 적(敵)도 만드는 격이다.
일등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삼성은 계속 발전해야 하고 세계 속의 일류기업으로 우뚝 서야 한다. 이등주의로 하향 평준화를 하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깍쟁이 같은 모범생보다 노는 듯하면서도 공부 잘하는 친구가 주변의 사랑을 받는다는 학창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라는 얘기다. 삼성 그룹에 대한 이미지 관리가 총체적 실패로 끝났다는 지적도 되새겨 봐야 할 때다. 차고 넘치기 보다 2% 모자라 보이는 겸손의 덕목이 아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창민 산업부장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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