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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23) 金芝河의 '五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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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23) 金芝河의 '五賊'

입력
200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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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적으로 1970년대는 김지하(64)의 담시(譚詩) ‘오적(五賊)’과 함께 시작됐다. 29세의 청년 시인이 발표한 이 새로운 형태의 시는 문학사적 의의 못지않은 정치사적 함의도 더불어 지니고 있었다.

월간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발표된 ‘오적’은 당시 야당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에 전재되며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확대돼 시인과 두 매체의 편집진을 감옥으로 보냈다.

1953년 창간된 이래 글자 그대로 한국 사상계의 둥지 노릇을 했던 ‘사상계’는 이 사건으로 폐간 처분을 받았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사건이었던 만큼 관련자들은 그리 오래지 않아 모두 풀려 나왔으나, 그보다 여섯 해 전 대일(對日) 굴욕 외교 반대 투쟁으로 첫 옥살이를 겪었던 시인에게 ‘오적’ 사건은 반(反)독재 민주주의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앵적가(櫻賊歌)’, ‘비어(蜚語)’, ‘오행(五行)’, ‘분씨물어(糞氏物語)’ 등 그 뒤 잇따라 발표한 담시를 통해 권력 주변의 악취와 외세의 경제적 침탈을 풍자하고 민중의 참혹한 삶을 고발한 이 입담 좋은 젊은이를 황군(皇軍)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는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시인은 1974년 긴급조치 위반에 더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의 어마어마한 혐의로 다시 구속됐고, 비상보통군법회의는 마치 장난처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47년 만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 이듬해 2월 석방되던 당시 모습

그러나 이 젊은 시인은 ‘오적’ 사건으로 이미 나라 밖까지 너무 이름이 알려진 상태였다. 구명 운동은 삽시간에 국경 너머로 퍼져나갔고, 석방 탄원서에 서명한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하워드 진 같은 이름들의 무게에 질린 정권은 이듬해 2월 이번에도 마치 장난처럼 그를 풀어주었다.

출옥하자마자, 시인은 감옥에서 통방한 인혁당 사건 관련자 하재완의 참혹한 술회에 기초해 이 사건이 고문으로 날조됐다는 사실을 폭로했고, 정권은 다시 장난처럼 그를 가두었다.

이번의 옥살이는 장난이 아니었다. 시인은 박정희가 죽고 한 해 남짓이 지난 1980년 12월까지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김지하라는 이름이 70년대의 중량과 맞먹는다는 뜻이다. 감옥 속의 김지하는 70년대 한국 문학의 치욕이자 축복이었다.

그것이 치욕이었던 것은 그를 감옥 안에 두고서도 70년대의 한국문학사가 별탈 없이 하염없는 장광설로 쓰여지고 있었다는 점에서고, 그것이 축복이었던 것은 감옥 속의 시인 덕분에 한국문학의 당대가 순전한 미몽의 시기로 기록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다.

30대의 김지하는 감옥 속에서 70년대의 부하(負荷)를 제 몸뚱이 하나로 버텨내며 개인사의 수난을 문학사적 사회사적 활력으로 전화시켰고, 그럼으로써 70년대가 박정희의 연대로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연대로, 김지하의 연대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설령 출옥 뒤 시인의 행적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김지하라는 이름에서 빛을 덜어냈다고 해도, 그 이름이 70년대 한국문학과 한국정치의 가장 뜨거운 상징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그 뜨거운 상징의 출발점이 ‘오적’이었다. ‘오적’의 문학사적 의의는 그것이 최초의 담시라는 데 있다. ‘담시’라는 용어는 중세 이후 유럽 여러 지역에서 성행한 소(小)?營?‘발라드’의 역어(譯語)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김지하가 ‘오적’을 발표하며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가 아니다.

시인 자신의 짤막한 정의에 따르면, 담시는 단형(短形) 판소리다. 93년에 솔출판사에서 나온 담시전집 ‘오적’의 자서(自序)에서 시인은 “판소리는 생명의 문학이다.

나의 담시, 그러니까 단형 판소리 역시 생명의 문법을 모토로 한다. 가락이 장단을 타거나 빠져나가는 중에 행간에 솟아나는 신명의 문법을 잘 살펴주시기 바란다. 언어 밑에 흐르는 신명의 분류 없이, 언어가 퉁겨내는 광활한 여백의 울림 없이 시, 특히 생명의 시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담시는, 판소리가 그렇듯, 활자로 고정돼 있는 언어가 아니라 활자 바깥으로, 활자들 사이로 뛰쳐나온 살아있는 언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김지하의 라벨이 된 생명사상은 그의 담시에서부터 일찌감치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담시는 구연(口演)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문학장르다.

판소리라는 민족적 구비문학의 전통 속에 자리잡은 이 장르는, 유럽쪽의 신어(新語)를 빌리자면, 리터러처(literature)라기보다 오럴리처(oraliture)에 속한다.

‘비어’의 첫 이야기 ‘소리내력(來歷)’은 안도(安道)라는 이농 도시빈민의 참혹한 삶과 죽음을 그리고 있는데, 활자로 발표된 지 두 해 남짓 뒤인 1974년 세밑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구연된 바 있다. 김지하 담시의 이 첫 구연의 주인공이었던 소리꾼 임진택은 80년대 중반 이후 ‘분씨물어’를 ‘똥바다’라는 제목으로 구연해 너른 호응을 얻기도 했다.

담시에 대한 긍정적 언술들에 따르면, 이 장르는 서사와 서정과 극을 녹여낸 장르고, 이야기와 노래를 통일한 장르이며, 풍자와 해학과 코믹과 그로테스크를 버무린 장르다.

이 장르의 ‘열림’을 강조하는 이런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대화한 판소리로서의 김지하 담시가 서양 시학에 매몰돼 있던 당대 시단에 적잖은 충격을 가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민중적 내용을 담아낼 민족적 형식을 모색하던 시인이 처음 다다른 징검돌이었다.

민중의 언어를 지향했던 만큼 담시는 어쩔 수 없이 군데군데 비속하지만, 결국은 청년지식인의 언어였던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군데군데 현학적이다. 담시의 맏형 격인 ‘오적’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됐는데, 민족어의 리듬에 깊이 밀착된 담시의 ‘신명’을 외국어로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적’은 글자 그대로 다섯 도적 이야기다. 이들의 이름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인데, 원문에서 한자로 표기된 이 괴상한 이름들은 죄다 개사슴록변이 달린 개견부(犬部)의 글자들을 포함하고 있어서(예컨대 ‘장성’은 長猩) 이들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임을 보여준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칠보”다.

이 다섯 도적이 하루는 서울 동빙고동에 모여 도둑시합을 벌이고 있는데, 어명을 받아 이들을 잡으러 온 포도대장이 되레 이들을 지목한 가난뱅이 꾀수를 무고죄로 몰아 감옥에 가두고 오적의 개 노릇을 하다가 얼마 뒤 그들과 함께 급사한다는 것이 ‘오적’의 줄거리다. 고작 상류층의 부정부패를 풍자했을 뿐인데, 이것이 무시무시한 반공법에 걸려든 것이다.

‘오적’의 마지막 대목은 “허허허/ 이런 행적이 백대에 민멸치 아니하고 인구(人口)에 회자하여/ 날 같은 거지시인의 싯귀에까지 올라 길이 길이 전해오것다”인 바, 시인은 ‘비어’의 둘째 이야기인 ‘고관(尻觀)’과 ‘오행’, ‘앵적가’, ‘고무장화’ 같은 담시 작품들 역시 ‘전해온다’ ‘전해오것다’ 따위로 마무리함으로써 이 이야기들이 화자가 전해들은 것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적’이 발표된 해에 상재된 첫 시집 ‘황토’ 이후의 서정시들이 그랬듯, 김지하의 담시들도 시인이 감옥에 갇혀 있던 1970년대엔 한국에서 책으로 묶일 수가 없었다.

1976년 12월 일본의 한양사에서 나온 ‘김지하 전집’은 그 때까지 발표된 시인의 담시, 서정시, 희곡, 산문을 망라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거꾸로 국내에 들어와 복사본이 나돌며 은밀히 읽혔다.

그 시절에는 김지하를 읽는 것조차 상당한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이 상상할 수 있을까? 그의 담시들이 ‘오적’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묶여 동광출판사에서 나온 것은 시인이 사면복권된 이듬해인 1985년이었다. 시인은 이 책 서문에서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고 말했다.

김지하는 일급 서정시인이기도 하지만, 문학사가들은 그를 담시의 개척자로 더 기억할 것이다. 시인의 바람과 달리 담시가 그의 후배 세대에게 계승되지 못한 것은, 이 장르가 예찬자들의 평가와 달리 충분히 열려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열림 여부와 상관없이, 이 장르가 젊은 세대에게 산뜻한 매력을 주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판소리를 쇼팽이나 브람스 음악보다 더 낯설게 받아들이는 세대가 담시를 즐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도 김지하 담시전집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요즘 형편이다. 70년대엔 읽고 싶어도 못 읽었던 그의 담시가 이젠 아예 안 읽히나보다.

▲ 오적(도입부)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

옛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흣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

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이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

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도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사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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