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2시 서울역 노숙인무료진료소 앞 노상. 허름한 행색의 남자 예닐곱 명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피 묻은 속옷바람에 목발을 짚은 이도 있고, 머리를 꿰맨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이도 있었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변덕스러운 날씨지만 이들이 앉아 쉴 만한 자리조차 없었다.
4.5평 크기의 진료소 내부로 들어서니 상황은 더 복잡했다. 작은 책상 3개와 의료용 간이 침대 1개가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의사와 간호사는 치료를 받으려는 노숙인들과 엉켜선 채로 진료를 했다. 간이 침대 위에선 한 여성이 진찰을 받고 있지만 공간이 분리돼 있지 않아 상체를 그대로 노출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전혀 보장할 수 없어 결핵처럼 민감한 질병을 앓는 환자들은 서울역 내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진료를 하기도 합니다.” 대한성공회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장수미(38) 현장진료팀장은 좁은 공간에서 노숙인들을 돌보는 고충이 가장 크다고 호소했다.
서울역 인근 뿐 아니라 시내 곳곳의 노숙인까지 몰려들면서 하루 평균 100여명씩을 진료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태로는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진료소 측의 설명이다.
진료소는 현재 공중보건의와 간호사 1명, 그리고 사회복지사 두 명이 낮에, 오후 7시~9시에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14개 단체들이 돌아가며 의료자원봉사를 한다. 진료는 노숙인 뿐 아니라 쪽방 주민 등 모든 의료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한다.
진료소는 고민 끝에 주한미군 RTO(여행장병안내소) 자리로 사용됐던 옛 서울역사(현 철도역사박물관) 내 공간을 유일한 대체 공간으로 보고 지난달 초 철도공사에 시설 사용을 요청했다.
지원센터 김해수(38) 기획팀장은 “놀고 있는 미군 RTO 자리를 노숙인 진료를 위한 공간으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수 차례 요청했으나 철도공사는 아무런 답변이 없다”고 말했다.
30여평 규모인 RTO는 1999년 미군들이 철수한 이후 철문을 굳게 잠근 채 흉가처럼 방치돼 있는 상태다. 지원센터 관계자는 “철도공사에 ‘임대료라도 낼 테니 공간을 빌려달라’고도 했지만 공사는 대답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철도공사 관계자는 “RTO는 비어 있지만 아직 한미행정협정(SOFA)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된 상태라 임의로 처리할 수 없다”며 “구 서울역사 전체는 향후 최초 건립 당시대로 복원해 ‘철도종합문화전시관’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진료소 측은 10일 철도공사 이철 사장 앞으로 시설 사용을 요청하는 정식 공문을 발송하고, 철도공사의 무성의한 태도에 항의해 이날 저녁 노숙인 진료를 서울역 광장에서 실시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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