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전쟁직후 맹장수술 받고 야반도주 70代 / 반세기만의 報恩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전쟁직후 맹장수술 받고 야반도주 70代 / 반세기만의 報恩

입력
2005.08.09 00:00
0 0

“이제라도 이 돈을 받고 저를 용서해주시면 편안히 눈을 감겠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서울적십자병원에 8일 오후 등기우편 한 통이 배달됐다. 겉봉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병원장님 앞’이라고 씌어져 있었고, 발신인은 따로 표시돼 있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관리부 직원이 봉투를 열어보니 뜻밖에도 500만원권 자기앞수표 한 장과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원장님께 용서를 빕니다. 다름이 아니오라…”로 시작된 사연의 주인공은 50년 전 이 병원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고 자신을 소개한 70대 노인 이모(72)씨. 한국전쟁 직후 병원비를 낼 돈이 없어 수술만 받고 도망을 쳐야 했다는 그는 “죽기 전에 50년간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과 가책을 털고 싶습니다”며 수표와 함께 눈물겨운 사연을 편지에 담았다.

스무살이던 1953년 갑자기 끊어질 듯 배가 아파 서울역 인근 한 병원을 찾아간 이씨는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악화해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때는 한국전쟁 직후. 끼니도 때우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 이씨와 이씨의 형은 수술비는 나중에 갚겠다며 수술부터 받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담당의사로부터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다.

이씨가 병원 밖에서 형과 함께 울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 “젊은 총각이 딱하다”며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서대문에 가면 나라에서 경영하는 적십자병원이 있으니 거기 가서 사정해보라”고 소개해줬다.

하지만 이 병원 역시 난색을 표하기는 마찬가지. 이씨 형제는 “병원비는 곧바로 마련해올 테니 제발 수술부터 해달라”고 울며 사정을 했다. 이때 옆에 있던 담당 여의사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내가 책임질 테니 수술을 하자”고 병원측을 설득, 이씨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10일간의 입원치료가 끝나고 퇴원날짜가 됐는데도 돈을 구할 수가 없자 이씨는 한밤중 병원 뒷문을 통해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 후 50년간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벌었다는 이씨는 “현재 당뇨와 고혈압, 동맥경화에 합병증까지 두루 겹쳐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며 “생을 마감하기 전에 사회에 끼친 누를 갚고 싶어 돈을 보내니 용서해달라”고 편지에 적었다.

김한선 서울적십자병원장은 “그 때는 누구나 다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이라며 “양심의 가책으로 오랜 세월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젠 다 털어버리고 편안하게 생각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적십자병원은 보은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 위해 은행과 우체국 등을 통해 이씨의 신원을 수소문을 하고 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