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8일 사전 예고 없이 청와대 춘추관을 찾아 35분 동안 기자간담회를 갖고 X파일 정국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국정원이 김대중 정부 시절의 도청 사실을 공개한 것을 놓고 제기되는 음모설을 부인하는 게 핵심이었다.
노 대통령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내가 덮으라고 했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면 누가 나와 참모들을 지켜줄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또 도청 테이프 공개와 수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뒤 테이프 공개 문제는 국회의 특별법 제정으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특별법을 둘러싼 위헌 논란 등 여야 대립이 한층 격화할 전망이다.
■ 도청 테이프 공개 여부
사생활 부분은 공개대상서 제외
노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미림팀이 만든 274개 도청 테이프 내용의 공개 여부에 대해 “공개할 것은 공개하고 비공개할 것은 비공개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그는 “테이프에는 범죄 사실도 있고, 국가적ㆍ역사적으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도 있고, 보호돼야 할 사생활 등도 뒤엉켜 있을 것”이라고 말해 사생활에 관한 것은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암시했다.
노 대통령은 “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며 현행법으로는 테이프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 뒤 국회의 특별법 제정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국민들 70%가 공개하라고 하고 테이프 안에는 사회정의를 위해 밝혀져야 할 구조적 비리 등이 들어있으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국회가 법을 만들지 않고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지난 주 휴가기간에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해 처리방향이 명확하게 정해지기 전까지는 일절 보고 받지 않겠다”는 뜻을 검찰에 전했다.
■ 정치적 음모說
도청 정국과 연정 문제는 무관
노 대통령은 DJ정권의 도청사실 공개를 놓고 음모설이 제기되는 데 대해 격앙된 목소리로 “무슨 음모설, 의도설을 자꾸 말하고 받아쓰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이런 게 포퓰리즘, 선동정치 아니냐”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김승규 국정원장이 사실을 은폐한 사람으로서 나중에 검찰에 불려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불법은 깊이 묻을수록 폭발력이 더 크게 터져 나온다”고 말했다.
“도청 사실을 덮으라고 할 경우 지시를 받는 사람이 수십명에 달할 텐데 그것을 누가 감당하느냐”고도 했다.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미림팀 이후에도 뭐가 좀 있었던 것 같다’는 보고를 했고, 부속실장도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곤란하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그런 상황에서 덮어버리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노 대통령은 연정론에 관한 글을 한미정상회담 직전인 6월 7일 이미 작성했다고 밝히면서 도청 정국과 연정 문제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 도청이 내용보다 문제
도청 지금까지 실체 드러난적 없어
노 대통령은 “정ㆍ경ㆍ언 유착과 도청 문제 중 도청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도청은 심각한 인권 침해이고 국가권력에 의해 가해지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며 “정경유착보다 가볍지 않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정경 유착은 5공 청문회 때부터 진상이 계속 밝혀져 왔지만 도청은 지금까지 의혹만 있었을 뿐이지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다”며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벌어졌던 국가 정보조직의 불법 행위에 대해 누구도 구조적으로 파헤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 모두가 ‘나도 도청 당하는 것 아니냐’고 불안해 하고 있으므로 도청은 현재와 역사의 문제”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정경 유착도 무거운 일”이라며 “그렇다고 정경 유착에 관해 남은 문제를 덮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 先 검찰수사 後 특검
'檢=못믿을 조직' 주장 동의 못해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 1,600명 검찰 조직이 도청 사건 하나 조사하지 못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조직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도청 실태 및 도청 내용 수사를 우선 검찰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검찰 조사를 한번 보고 믿기 어려운 구체적 의혹들이 있다면 그때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하든지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정부 조직을 함부로 무력화시키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검찰에 무슨 제척 사유가 있느냐”며 “검찰과 대통령이 연루돼 있지 않은 사건에 대해 특검을 도입하자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야4당이 이날 법안을 공동 발의키로 합의한 특검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천명한 셈이다. 그러나 공개된 X파일 내용에 일부 검찰 간부에 대한 ‘떡값’ 제공 釉炷?포함돼 있는 점을 들어 “검찰이 연루돼 있지 않다는 노 대통령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정원 개혁 방안
수사 끝난 후 조직개편 검토할 수도
노 대통령은 국정원 개혁에 대해 “나도 국정원의 조직과 역할을 정비한다고 했는데 또 뭐가 남아있는지 수사가 끝나고 보자”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참여정부 출범 후 이미 해외정보 수집 강화 등을 목표로 조직 개편을 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큰 수술을 단행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지금 단계에서 그런(국정원 개혁) 논의는 좀 앞질러가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며 “수사를 통해 도청과 관련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고 그와 더불어 국정원 조직에 대해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제기된다면 조직을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마무리된 국정원 조직 개편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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