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완고하고 점잖은 체하는 아저씨들은 대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모호하고 사람 말을 잘 듣지 않으며 어둠 속에 칩거하여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속성을 지녔다.
충직한 강아지처럼 든든한 느낌도 주지 않고 끼니 때마다 식사를 주는 사람에게 아무런 고마움도 느끼지 않는다. 간혹 사람 앞에서 애교를 부리더라도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혼자 흥이 나서 그러는 것일 뿐이다.
아랫도리를 까뒤집고 재롱을 피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하게 돌아서서는 고고한 척, 창가에 앉아 저만의 몽상에 빠져든다. 그러니 주방에서 일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남근 숭배자들에게 고양이는 참 얄밉고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고양이는 잡균을 옮기는 해충이나 다를 바 없다.
세상에 흔해 빠진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류의 얘기를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칫 사실 무근일 수 있는 고양이에 대한, 그리고 일반 남성에 대한 편견을 새삼 강조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황병승의 시집 ‘여장 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를 읽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질구레한 생각들 중 하나일 뿐이다.
2003년에 데뷔해 지금까지 한국 문단에선 보기 힘들었던 거울 뒤쪽의 세계를 꾸준하게, 그리고 자유분방하게 그려내는 그의 시는 흡사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고양이의 무의식을 그려낸 듯하다.
그러나 그는 남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종의 성전환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여장 남자’에 가깝다. 그의 실제 삶이 그러한 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시에서만큼 그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없었던 ‘이반’에 속한다.
그 ‘이반’은 사뭇 질서 정연해 보이는 세계의 표면을 앙칼지게 거스르며 ‘다른 말’을 한다. ‘다른 말’인 만큼 그것은 통상적 의미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저 문자로 기록된 미증유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의 독해보다는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세상이 감히 하지 말라고, 넘지 말라고 한 뚱딴지 같은 정언 명령들을 사뿐히 위반하는 쾌락만 접수해도 모자랄 게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는 일그러진 소리들을 흘려 내보내는 수제 악기와도 같다. 특별한 주법도 필요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톤을 잡고 흔쾌히, 주절주절, 그려진 이미지들의 음색과 파장을 제 멋대로 나열하면 끝이다. 그건 일종의 흔치 않은 놀이지만,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서 제각각의 용도로 얌전히 놓여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세상의 모든 어른들께는 참으로 경박하고 위험스런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한밤중에 주방을 우당탕탕 뛰어 다니는 고양이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격노한 소리로 저주를 퍼붓는 아저씨일 것이다. 고양이 입장에선 단순히 놀이일 뿐이지만 아저씨에게 고양이는 평화로운 안식을 방해하는 무례한 훼방꾼이자 정나미 떨어지는 ‘악의 화신’이다.
잠에서 깬 아저씨는 빗자루 몽둥이를 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고양이와 야밤의 사투를 벌인다. 별 뜻 없는 장난질 덕분에 철 없는 고양이는 사생결단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영리한 고양이에겐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저만의 독도법, 황병승이 루이스 캐럴의 판타지에서 변용한 ‘앨리스 맵’처럼 자신들만의 유연하고 민첩한 공간이동술이 있기에 이상한 나라의 폴이 마술봉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것과도 같은 사차원의 공간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고양이는 자신만의 ‘언더그라운드’로 소리 없이 돌아온다. 황병승 시의 탯줄은 바로 그 ‘언더그라운드’에 있다.
‘언더그라운드’는 어떤 의미에서 지상보다 시끄럽다. 정말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지상과는 다른 동선 다른 음색 다른 형상으로 존재하는 그곳의 양상이 상궤를 벗어나 독특한 질서체계로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곳은 아주 조용한 세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낯설고 불편한 것들은 침묵조차도 시끄럽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그 소란스런 침묵은 때때로 지상의 인간들에게 엄청난 모멸감을 던져주면서 본의 아니게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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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끼꼬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ず鰥?싫은 행동이에요, 라고 말하는 순간
나 아끼꼬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건 왜일까
그렇다고 침묵을 하면 뭔가 달라질까
그래도 역시 나쁜 사람이 되고 만다
- 황병승 시, ‘부드럽고 딱딱한 토슈즈’ 1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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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의 행동은 나쁘려고 나쁜 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온하고 음흉하다.
‘나빠요 싫은 행동이에요, 라고 말하는 순간’ ‘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마는’ 이런 불합리는 ‘언더그라운드’가 노정하는 나름의 존재방식이기도 한데, 황병승의 시는 일반 세상의 역상들을 변증법적으로 배치시킨 비판 의식에서 쓰여졌다기보다는 그 자신의 내밀한 몽상과 자족적인 욕망의 분비물들을 체스 게임하듯 펼쳐 놓았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런데 그런 무고하고 무심한 놀이가 발산하는 힘은 의외로 진폭이 크다. 그의 시는 혁명이나 반역을 전혀 얘기하지 않은 채로 혁명적이고 반역적인 기질을 농밀하게 드러낸다.
그런 관계로 세상에 대한 별다른 악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언더그라운드’는 종종 어떤 이들(가령 고양이를 쫓는 아저씨)에겐 존재 자체가 ‘나쁜 짓’이 되기도 한다.
‘언더그라운드’ 가 가끔 지상으로 나들이할 때가 있다. 고양이를 예뻐하는 사람이 있듯 ‘언더그라운드’에 호의적인 지상의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 이 때 하기 쉬운 착각 중 하나가 ‘언더그라운드’가 지상에서 낙오된 자들의 공동체라거나 하루라도 빨리 지상에 오르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자들의 잠정적 공간이라는 오해이다.
‘언더그라운드’는 지상의 제도와 법칙에서 소외된 자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창적인 삶을 실천하는, 태양 광선의 외곽 지대이다. 따라서 ‘언더그라운드’란 말은 존재의 처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존재의 방식을 일컫는다. ‘언더그라운드’와 지상 사이에 중간 영역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 또한 또 다른 단어로 지칭되는 제 3의 영역일 것이다. ‘언더그라운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그러니 햇볕만 먹고 사는 지상의 존재들이 그들을 가여워 하거나 우월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언더그라운드’에겐 그들만의 맛있는 밥이 있다.
아울러 지상 나들이에 나선 ‘언더그라운드’도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지상은 무서운 곳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선 재미로 여겨지는 일이 지상에선 엄청난 잘못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불편하고 짜증난다고 해서 있는 성질 다 드러내고 만다면 돌아오는 건 몽둥이 세례뿐이다. 지상의 인간들의 요구에 맞춰 예쁜 척 얌전한 척 곰살궂게 군다면 아예 햇빛 속으로 나가지 마라. 아무데서나 마술봉을 휘두르며 사람 흉내내는 고양이를 예뻐라 하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
그러나 이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을 때 숱한 오해와 분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불화는 고양이와 아저씨의 추격전처럼 집요하고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없다.
마당으로 도망쳐 꼬리를 감춘 고양이를 쫓던 아저씨의 화가 극에 달했다. 어쩌면 전혀 화낼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저씨는 그저 자신이 화내는 것에만 충실할 뿐,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없다. 어쩌면 저녁에 거나하게 한잔해서 판단력을 상실한 건지도 모른다.
악에 받힌 아저씨는 빗자루 몽둥이를 팽개치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온다. 고양이의 서식처인 ‘언더그라운드’를 초토화시키겠다는 것인데, 이럴 경우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예기치 못한 전면전으로 확대된다. 고양이는 그저 놀려고 했을 뿐이지만, 아저씨에게 고양이의 놀이는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무시무시한 도발에 다름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놀러와 사람 놀래키는 짓을 한 고양이도 잘못한 건 마찬가지지만, 이제 문제는 철 없는 고양이 한 마리와 이해심 없는 아저씨의 실랑이에서 벗어나 온 집안 식구들의 잠을 깨우면서 난리 법석이 된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일이 아저씨들 세상에선 다반사인 바, 배 나온 아저씨들을 정작 움직이게 하는 건 전쟁도 태풍도 아닌 그들이 보기에 한낱 ‘빈대’에 불과한 ‘낯선 종족들’의 ‘무례한 짓’이다.
전쟁이나 태풍을 견딜 힘은 없지만, 그들에게 빈대는 자신의 위신과 힘을 과시하는 참 먹음직스런 먹이이다. 집 한 채 불타는 것쯤이야 아저씨들에겐 ‘좋아요 옳은 행동이에요, 라고 말하는 순간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삶의 기폭제 앞에 무에 아까울 게 있겠는가.
이러구러 막 나온 황병승 시집이 더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요즘, ‘언더그라운드’ 고양이 친구들의 놀이터가 심히 걱정된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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