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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20)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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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20) 연재를 마치며

입력
2005.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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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의 건축현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부정적 현상에 대해서 주로 비판적 입장에서 얘기를 해왔다. 그러나 물론 이런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 가능성도 관찰된다. 지켜야 할 것 세 가지를 들고 싶다. 결코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보잘 것 없는 들풀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찾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작은 것에서부터 찾고 싶다.

건축가의 임무에는 황제를 위한 웅변의 봉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이 무의식 속에서 싹트는 작은 씨앗을 찾아내 세밀하게 돌보고 키울 줄도 알아야 한다. 한 시대의 진정한 정신이란 이 두 가지의 협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앞의 거창한 것에만 너무 매달려왔다. 빌딩도 아파트도 문화회관도 모두 크고 높고 거창하게 지을 생각만 했다. 관광을 가도 일류 문화재에만 몰려들었다. 이제 작고 초라한 것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지켜야 할 것 세 가지로 꽃가게, 거리의 책상, 골목길을 들고 싶다. 꽃가게는 숨 막히도록 삭막한 도시환경에 한 줄기 희망을 던져준다. 붉은 장미와 푸른 난초를 보고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가게 건물은 초라하지만 예쁘다. 꽃과 나무를 담는 밝은 유리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타워팰리스의 폐쇄적 유리와는 전혀 다르다.

공해와 스트레스에 찌든 피곤한 도시인들에게 잠시나마 따뜻한 감성을 나누어주었으니 가장 자기다운 투명성을 확보했다. 장식도 마찬가지이다. 러브호텔의 천박한 신전도, 영화관의 할리우드 양식도 아니다. 꽃이라는 딱 그것에 맞는 장식이다. 색도 그러하다. 모델하우스의 가식적 초록이 아닌 꽃이라는 딱 그것에 맞는 색이다. 삭막한 도시 사이사이에 보석처럼 박힌 이런 꽃가게들도 도심이 고층건물로 재개발되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지켜야 된다.

거리의 책상은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사실은 간단한 것이다. 앉아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책상을 집 안에만 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다니는 공적 영역에도 많이 만들자는 말이다. 벤치까지는 많이 볼 수 있으나 거리의 책상은 참으로 보기 힘들다. 거리의 책상이라는 단어가 생소한 것부터가 그동안 ‘거리’와 ‘책상’은 소와 닭처럼 아무 상관없는 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리에 책상이 놓일 수 있는 곳은 참 많다. 놀이터, 공원, 광장, 대학 캠퍼스, 길거리 공터, 고층건물 앞 포켓 공간, 카페와 편의점 앞 등등이다. 이런 공적 영역에 벤치뿐 아니라 책상을 함께 두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우선 4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최소한 6개월 동안은 외부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다. 한가로이 쉬는 것은 물론이고 간단한 집안일도 들고 나와서 할 수 있고 공부나 사무잡일도 할 수 있다.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거나 어린아이들은 보드게임도 들고 나와서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활성화만 되면 생각 외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집 밖에서 많은 일들을 하게 되면 그 자체로 좋은 점 이외에 다른 좋은 일들이 추가로 발생할 수 있다. 먼저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많아진다. 집 밖에서는 늘 바쁘게 이동하며 서로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머묾이 생기면서 주변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서로 보고 보여지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의 심적 교류를 증대 시킨다. 환경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도 이어진다. 집 밖 공간이란 몰래 쓰레기나 버리고 자동차 주차로 옆집과 싸움이나 하던 불쾌한 공간이었다. 이것이 바뀌어 주변환경을 잘 가꾸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내 마음은 내 집 대문까지만 강하게 한정되어 있던 것이 슬그머니 대문을 넘어 그 밖으로 나와 옆집 사람의 마음과 만날 수 있다.

골목길은 한국적 심성에 잘 부합하는 공간구도를 가지고 있다. 골목길은 미로의 포근한 친밀감이 기본 특징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 같다는 말이다. 스케일도 사람 크기와 잘 어울리는 적당한 규모를 유지한다. 담과 문은 인본주의적 척도로 이루어졌다. 골목길의 모든 공간 골격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사지라는 자연지형과 옆집이라는 인간적 네트워크에 맞춘 것이며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의 조형적 감성으로 마무리했다. 모두가 경험적 특수성의 가치들이다. 집과 집 사이, 골목길 어귀에는 적당한 공터가 만들어진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숨통인 동시에 어린이 놀이터로 긴요하게 쓰인다. 평대라도 놓으면 시골에 두고 온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그늘을 대체하는 훌륭한 공적 영역이 된다. 이런 골목길은 아파트 계단 같은 물리적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파란 담을 따라 조금 가다 계단을 세 단 오른 뒤 왼쪽으로 꺾어지면 전봇대가 있고 다시 초록 대문을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 가면 우리 집이 나오는 식이다. 조형 환경은 공간의 질적 차이로 파악된다. 그만큼 개개인의 개성이 존중되고 다양성이 지켜지는 彭?구조이다.

골목길에 담겨있는 이런 특징들은 현대 건축가들이 만들어내고 싶어서 안달인 조형적 가치들이다. 현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유명한 에셔의 ‘불가능한 공간’ 혹은 ‘뒤틀린 공간‘ 시리즈는 우리와 유사한 북아프리카나 유럽의 고도들에 남아있는 골목길을 보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베르그송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현대 사상가들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한국의 골목길은 특히 능선에 자연적으로 적응한 산물이었기에 더 없이 아름답고 풍부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소중한 보고를 우리는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지우개로 틀린 계산 지우듯이 너무 쉽게 없애버린다. 골목길 밀어 없애고 능선 까낸 다음 30층 아파트 세우는 일이 당연지사가 되어버렸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물론 소위 달동네라는 불량주택촌이었기에 언젠가는 헐려야 될 것들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한 가지는 달동네가 아닌 훌륭한 골목길도 많이 있는데 예외 없이 똑같이 헐려나갔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는 설사 불량주택이었기 때문에 헐렸다 해도 그 대안이 초고층 아파트로 나타나야만 했는가 하는 점이다. 새로 짓는다 해도 낮은 능선을 타고 나지막한 집들이 골목길의 공간구도를 가지며 옹기종기 아기자기 모이도록 지을 수도 있다.

미국과 유럽의 대도시들에는 이런 식으로 재개발한 예들이 얼마든지 있다. 아니 대부분의 재개발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처럼 능선 파내고 그 자리에 30층짜리 아파트를 세우는 재개발은 아주 비상한 경우 아니고는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골목길 같은 아담하고 포근한 동네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한때 한국의 현대 건축가들도 골목길 구도를 현대적으로 혹은 고급예술로 재해석 해내려 잠시 애를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별무 성과였으며 이제는 그나마 관심의 대상에서조차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하찮은 것으로 무심코 지나치거나 심지어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며 열심히 버려왔던 것에는 이처럼 우리가 처한 문제에 대한 소중한 해답들이 들어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갈등과 정신의 병은 건축을 삶을 위한 섬세한 공간 만들기로 보지 않고 돈벌이로만 보는 데서 기인한다.

삶의 질이다 웰빙이다 해서 해답을 구하려는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먹고 입는 것에서만 찾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한 사는 것에 대한 기본 인식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는 것에서 돈 더 벌어서 먹는 것과 입는 것에서 웰빙을 해보겠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인식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발상이다. 우리가 사는 것부터 가장 먼저 둘러보아야 할 일이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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