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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법을 짓밟는 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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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법을 짓밟는 특별법

입력
2005.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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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국가나 불행한 일, 불행한 시대를 겪을 수 있다.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때도 있고 불가항력일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 통치, 남북 분단과 대결, 군사독재 등 바람 잘 날 없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 왔다. 그래서 과거의 잔재나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지금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옛 안기부의 도청 사건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과거의 상처다. 군사독재 시절의 도청은 상식에 속했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 도청을 했다는 것 역시 경악할 일은 아니다. 그들이 집권한 후에도 부패와 권위주의 등 독재의 악습이 지속됐으니 도청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드러난 과거의 도청에 대해서는 새삼 개탄할 필요가 없다. 일부 도청 테이프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적나라하게 밝혀진 재벌ㆍ언론ㆍ정치의 유착도 마찬가지다. 유력 언론사의 사장이 주차장에서 현금 뭉치를 직접 옮겨주고 “꽤 무겁더라”고 말하는 장면이 엽기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유착관계를 짐작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다 짐작했던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런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불행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초법적인 사고방식이 만병의 근원이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청 테이프의 존재가 드러나자 정치권이 처음 한 일은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테이프 내용이 공개되면 누가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인가, 정국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머리 굴리기에 바빴다.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는 것이 불법이냐 아니냐는 다음 문제였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도청 테이프 공개가 불법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 특별법까지 제정해서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겠다는 것은 야당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고, 한걸음 더 나가 추락일로인 여당의 입지를 바꿔보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헌법에 사생활 보호나 통신비밀 조항이 있지만 그것은 사생활 영역에 국한된 것이고, 진실을 밝힘으로써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에는 내용을 공개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또 대다수 국민이 공개를 원한다는 사실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경우에는 도청을 해도 큰 잘못이 아니다”라는 위험한 생각이 숨어 있다. 과거의 권력층, 기업, 유력 언론 등의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를 파헤치는 것이니 사회정의에도 부합한다는 생각까지 감지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재야세력이라면, 또는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권은 법에 따라 시행된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특별법을 만들어 도청 테이프를 공개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공개로 인해 아무리 자신이 유리해진다 해도 그런 유혹을 떨쳐야 한다.

대다수 국민은 안기부의 도청 사실뿐 아니라 도청된 내용에도 치를 떨고 있다. 일부 공개된 사회 지도층의 행태가 너무도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남은 도청 테이프를 모두 공개하라는 국민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도청한 내용의 공개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일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불행을 수습하고 극복하는 자세가 비이성적이면 과거와 현재 모두가 치욕이 된다. 그리고 미래 또한 과거의 반복일 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에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의 도청 사실이 아니라 그 사태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국가기관의 불법 도청을 엄중하게 단죄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과거의 불행을 극복하는 길이다.

필요하면 특별법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현행법을 정면으로 짓밟는 특별법을 만들겠다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다. 과거의 불행을 현명하게 극복하여 역사가 앞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

한국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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