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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등재 1년-고구려 유적을 다시 찾다/ (下) 유적현장의 역사왜곡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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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등재 1년-고구려 유적을 다시 찾다/ (下) 유적현장의 역사왜곡 실태

입력
2005.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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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적 답사를 마치고 백두산을 거쳐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옌지(延吉)로 가는 차 안에서 재중동포(조선족) 가이드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냈다. “고구려인은 조선족이 아니다.” 옌볜(延邊)과 옌지를 안내하던 가이드가 앞뒤 설명도 없이 내뱉은 말에 듣는 사람들이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도대체 가이드는 왜 맥락도 없이 이런 말을 불쑥 꺼냈을까?

힌트는 고구려 산성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지린(吉林)성 지린(吉林)시 용담산성 입구의 안내판에서 얻을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 안에 사는 조선족은 모두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반도를 침탈한 뒤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해 강을 건너 우리나라 경내에서 사사로이 개간한 조선의 빈곤한 유민이지 결코 고대 고구려 또는 고려의 후손이 아니다.’ 바로 이 내용인 것이다.

가이드의 말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동은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2002년부터 옌볜에서 실시하고 있는 ‘3관교육(三觀敎育)’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며, 조선족 역사는 중국역사’라는 조국관, 민족관, 역사관 교육이다.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3관교육을 받은 것은 조선족이 유일했다고 한다. 3관교육의 내용에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는 슬로건이 있어서 가이드가 무의식 중에 그런 말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옌볜의 모든 가이드에게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라고 선전하도록 강요했을 수 있다. 지안(集安) 가이드들에게는 책을 할당하고, 옌볜에서는 이런 관점을 전파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가이드의 엉뚱한 설명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야 말로 엄연히 고구려의 후손이 아닌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가에 사는 조선족들은 다수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살던 동포들이고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고구려의 후손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인들은 압록강 북녘에서는 발해, 여진, 만주족으로, 압록강 남녘에서는 발해, 고려, 조선 사람으로 살아왔다. 압록강 남쪽에서 살던 고구려 후손이 압록강 북쪽으로 넘어갔을 뿐인데 어찌하여 “고구려인은 절대 조선인이 아니다”는 것인가.

일제시대 만주의 인구는 2,000만 명, 조선반도의 인구는 3,000만 명 정도였다. 만주에 중국의 한인(漢人)들이 대거 이주해 온 것은 중국이 처음으로 만주를 완전히 차지한 일제 패망 이후의 일이다. 한족들은 이후 만주족과 조선족이 살던 땅에 엄청나게 밀려들어 지금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한족이 고구려 후손들에게 ‘고구려인은 조선인이 아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용담산성 앞에는 최근 4개의 안내판이 새로 섰다. 그 중 2개는 이 산성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고구려의 역사 연원’이라는 제목을 달고 고구려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다. 이 중에는 주몽이 나온 부여가 중국의 소수민족 계통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인은 결코 조선인이 아니다(高句麗人幷非朝鮮人)’는 제목으로 고구려인의 계통을 학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고대 동북에는 상(商), 동호(東胡), 숙신(肅愼), 맥예(貊穢) 같은 4개의 큰 종족이 있었다. 고구려는 과연 어떤 종족에서 비롯되었는가? 많은 연구자들의 관점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지만 최신 연구에서 은(殷) 또는 상(商) 계통의 사람이라고 확정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옛 조상이 남긴 단순한 말귀가 아니고 수많은 발굴 가운데서 찾아낸 것으로, 문헌과 유물을 아울러 나온 인식이다.< p>

몇몇 학자들은 이미 고구려 문화와 은상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했으며 아울러 저작과 논문에서 거듭 주장하였다. 지린성 지안 경내 고구려 무덤 벽화 가운데 용과 뱀의 그림, 기악비천(伎樂飛天), 복희여왜(伏羲女娲), 신농황제(神農黃帝) 및 4신 같은 그림과 형상은 염황문화(炎黃文化)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최근 퉁화(通化)시 부근 왕팔발자(王八脖子) 유적과 퉁화현 여명(黎明) 유적 같은 대표적인 옛 유적에서 옛 문헌에 나오는 삼환제단(三環祭壇)이 발견되었다.

이 제단은 문화 구조상 모두 삼환계단식(三環階段式) 전방후원(前方後園) 구조로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데 삼중천(三重天)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념을 구현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원시 본원 철학사상의 정수이며, 또 지역적으로도 서로 가깝고 시간적으로도 서로 이어져 있다. 많은 역사문화의 구성 요소들이 고구려인은 상인(商人)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상인이 건국하거나 상인이 중원으로 들어가기 전후 동북방으로 옮겨온 한 종족일 수 있다. 고구려의 근원은 상인(商人)으로 5제(五帝) 계통이고 염황문화(炎黃文化)의 후예이다.

몇 년 전에 나온 ‘중국동북사’ 1권 6장에는 여러 문헌자료를 인용하여 ‘고구려는 고조선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현도, 낙랑은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하였는데 모두 조선, 예맥, 구려 같은 오랑캐(蠻夷)다’고 되어 있다. 조선과 구려를 함께 쓴 것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당시 두 개의 서로 다른 부족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고구려 남쪽과 조선이 맞닿아 있다고 나와 있어 고구려는 당시 조선을 영유하지 않았고, 조선도 고구려를 포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앞 세대 사람들이 일찍이 한 번 위씨조선에 예속된 적이 있지만, 그것은 기원전 128년까지 60~70년 정도밖에 안 되어, 중원 정권에 신복(臣服)한 600~700년이란 시간에 비하면 차이가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모두 고구려족과 그 조상들은 고조선과 지리상으로 보나 정치상으로 모두 연대(連帶)와 종속관계가 확실하지 않다고 인정한다.>

고구려의 근원에 대한 이런 관점은 중국에서도 주류로 대접 받지 못하는 황당한 내용이다. 지금까지도 이건재(李健才), 장박천(張博泉), 쑨진지(孫進己), 동동(佟冬) 같은 주요 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의 기원을 예맥(濊貊)에 두고 있다. 1990년대 초에 리더산(李德山)이란 젊은 학자가 “고구려는 염제족(炎帝族) 계통이고 산둥(山東)반도에서 옮겨왔다”고 했는데, 당시 중국의 학자들은 마치 재야사학자의 주장처럼 황당하게 생각하였다.

이어 겅톄화(耿鐵華)가 몇 가지 고고학적 사례를 붙여 “랴오서(遼西) 지방에서 발생한 홍산문화가 서쪽으로 가서 은나라를 세우고, 동쪽으로 옮겨와 고구려와 부여 같은 나라의 기원이 되었다”고 구체화하였을 때도 극히 소수 의견으로 받아들였다.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중국 내에서 학술적으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기원을 홍산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전설인 3황5제에 결부시켜 말하기로 한다면 ‘시베리아와 동아시아는 물론 아메리카 인디언도 모두 고아시아인이다’는 논리가 훨씬 더 그럴싸하다. 고구려의 근원을 전설과 연결하는 것은 진실을 규명하려는 학문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소수 의견이 당당하게 고구려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등장할 수 있는가? 이것은 중국의 특성이나 중국 국가 연구기관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 국책연구기관으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라는 제목으로 총론(2001년)과 속론(2003년)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여러 필자 중에는 앞서 언급한 저명한 중국의 고구려사 전문가가 한 명도 들어있지 않다. 겅톄화만이 ‘속론’의 저자로 등장한다. 중국의 국가연구기관이 바로 ‘고구려 상인 후예설과 염황문화설’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겅톄화는 2002년 ‘중국고구려사’라는 저서에서 이런 주장을 폈고, 용담산성 안내문은 대부분 그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한ㆍ중 양국이 고구려사 왜곡을 방지하기로 구두양해한 지 1년이 지난 오늘까지 중국은 역사침탈작업을 계속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1년 동안 중국은 이제 연구 단계를 지나 그 결과를 유적 현장에서 알리는 단계로 진전했다. 이 작업은 지방 정부가 주도해서 진행하고 있어 중국의 중앙 정부는 외교적으로는 언제든지 변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용의주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역사를 강탈당하고 있는 우리는 대책도 없이 세월만 보낸 건 아닌가. 한국과 중국의 처지는 다르다. 중국은 시간을 벌면서 지금까지 왜곡한 역사를 이제 기정사실로 만들면 된다. 지방 정부가 나서서 그 동안 만들어 놓은 교육장(박물관)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고, 여러 가지 출판물과 유적지 안내판, 관광 안내원을 통해 그 단계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고구려사는 과연 누구의 역사가 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ㆍ전 고구려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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