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의 불법 도청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공개 또는 수사하라는 요구가 확산되고 있지만, 검찰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2일 압수한 도청테이프 274개의 분석 상황에 대한 취재진의 거듭된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참여연대가 고발한 도청테이프 내용(삼성그룹의 불법정치자금 제공 의혹) 수사에 대해서도 “지켜봐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수사 진행 상황 현재 검찰이 떠맡은 과제는 모두 세 가지. 안기부의 불법도청 행위와 도청테이프 유출, 그리고 도청테이프 내용공개 및 수사 여부다.
불법도청과 관련해선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씨를 상대로 미림팀의 활동 내역을 상당부분 파악해가고 있다. 불법도청 실태에 관한 국가정보원의 최종 조사결과가 나오는 대로 관련자들에 대한 보강조사를 거쳐 사법처리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물론 미림팀 재조직을 최초 지시하고 도청 내용을 보고 받은 윗선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검찰의 수사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핵심 관련자들이 진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출 부분도 재미교포 박인회씨와 공씨 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대부분 확인했고, 5일 MBC 이상호 기자를 불러 박씨의 진술 내용을 확정지으면 된다. 박씨로부터 청탁과 함께 녹취보고서를 건네 받은 것으로 알려진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도 이날 전격 소환해 조사했다. 수사의 속도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문제는 정치권, 재벌, 언론사 등 사회 지도층이 망라된 것으로 알려진 도청테이프의 내용공개 및 수사 여부다. 검찰은 도청테이프 공개가 통신비밀보호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어서 불가하다는 원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공개 여부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하지 않고 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검찰의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뭐라 말하기는 그렇다. 때가 되면 말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검찰이 법 집행 기관으로서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고 있다. 삼성그룹에 대한 수사도 고발인인 참여연대 관계자를 수사한 것 외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높아지는 외부 압력 이처럼 통신비밀보호법에 발이 묶여 검찰이 섣불리 테이프 내용에 접근하지 못하자 문제 해법에 대한 논의를 사실상 검찰 바깥에서 주도하는 양상이다.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인 언론개혁국민행동은 이날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1시간 간격으로 기자회견 및 집회를 열어 삼성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을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정치권에서는 테이프 내용 공개여부를 판단할 독립적인 제3의 기구 설치, 이를 위한 한시적 특별법 제정, 특검제 도입 등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황교안 차장은 이 같은 여론 동향에 대해 “법조 기자들이 쓴 기사만 보기에도 바쁘다. 솔직히 정치면은 제목만 보고 넘긴다”며 편치 않은 심정을 내비쳤다. 검찰은 이것저것 감안해야 할 수사외적 상황이 늘어나면서 갈수록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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