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다. 노향림 시인의 새 시집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창비 발행)의 아무 시편이나를 펼쳐보면, 존재하는 뭇 것들이 비릇는 감흥이 물성 자체에 개입한 시간으로 하여 오롯해짐을, 실감할 수 있다. “…수북이 지는 세상을 꽃방석처럼 깔고/ 잠 못 든 불안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점 백짜리 화투를 친다.// 시간은 종일 쌓여 있거나 넘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봄날은 가고’ 부분)
1970년 등단해 지금껏 4권의 시집을 낸 그는, 우리 시단에서는 드물게 “말로 그림을 그려온”(고종석의 ‘시인공화국 풍경’에서) 시인이다. “부끄럽게 피어 그 꽃의 이마에/ 한 뼘의 가을이 와서/ 발 딛다 미끄러진다”(‘깨꽃 핀 날’ 부분) “안개주의보가 내린 마을 일대가/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어 하얀 홑청 이불로/펄럭펄럭 날갯짓하는 사이”(‘강화읍을 지나며’ 부분) “하르르 꺼질 듯 졸다가 깨어나다/ 제 눈 속에 눈다래끼만한 하늘을/ 밀어넣고 있는 풀꽃”(‘맑은 날’ 부분) 등등은 세필 수채화 속 풍경처럼 투명하다.
하지만 그 풍경에 시간이 얹히면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그가 이번 시집의 두드러진 풍경으로 ‘시간’을 선택한 연유는 뚜렷하지 않으나, 그로 하여 그림들의 질감이 묵직하고 차분하게 정돈됨은 분명해 보인다. 시에서 시간은 풍경의 주체(존재 자체)로, 숙명의 굴레로 환유되고 있다.
가령 염전 바닥에 귀를 대고 ‘시간이 팽팽하게 걸러지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냄비 뚜껑을 밀어대는 증기를 두고 ‘끝없이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시간들’이라 한다거나, 초보 낚시꾼들이 ‘눈 시린 푸른 핵심’을 낚지 못하고 ‘잔챙이 시간’만 낚는다고 할 때의 그 시간은, 시간으로 환산된 실존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그 실존들은 대체로 ‘태엽 풀린 시간’ ‘헛바퀴 도는 시간’이고, 권태롭고 ‘폐쇄회로 같은’ 굴레의 시간, 정물 같은 시간이다. 거칠게 말해 세계관이란 것은 시간에 대한 입장으로 범주화 된다면 시인의 세상과의 불화(不和)는 생득적인 숙명인 듯하다.
향기를 전하지 않는 꽃 그늘 아래에서 “속절없이 기다리는 동안/ 재로 삭아내려 꽂히는 한 움큼의 시간”(‘꽃을 켜다’ 부분) 같은 삶. 다만 이 기다림이 모종의 가치나 희망에 대한 그리움 혹은 갈망이라면 황사 바람에 ‘쌀겨처럼 보얗게 시간을 뒤집어’ 쓴 채 ‘시멘트 벽에 기대어 근육위축증으로/ 몸을 뒤트는 봄풀’(‘낯익은 봄’)로 살아도 좋으리라. 이들 정물 같은 시간의 풍경이 답답한 듯 자유롭고, 스산한 듯 막연히 부푸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 양수리의 저녁
물안개 핀 양수리의 저녁
바람이 수축한 풀들을 강쪽으로 밀어낸다
가두리 양식장의 노인은 돌아오지 않고
갇힌 물 위를 낮게 낮게 나는 새들의
몸에선 프로펠러 소리가 난다
몇마리는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틈에서 곁눈질을 한다
창백하게 질린 수은등이 납빛 얼굴로
포복하는 저녁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물비늘 냄새를 터는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 위에서 반짝이기만 하는 시간들
단 한발짝도 건너오지 못하는
이 먼 그리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