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양(瀋陽) 땅을 꽤 오랜만에 다시 밟는다. 7월 23~29일 농어촌 청소년 답사단 30여 명을 인솔해 1년 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의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 도시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과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을 찾았다. 중국 동북지방의 관문인 선양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유산 고구려 유적-환런’이라는 선전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고구려 유적에 몰리는 관광객 행렬
고구려 첫 수도 환런은 마침 휴일이어서 시장터처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관광객을 이끄는 수많은 가이드들이 앞 다투어 휴대용 마이크를 들고 유적을 설명하는 바람에 한참을 기다려서야 오녀산성의 유적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산성 입구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쓴 메달을 팔았고, 지난해 이미 확인한 사적진열관의 고구려사 왜곡 문구는 한 자도 바뀌지 않았다.
인파가 몰리기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며 유적의 보고인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앞두고 광개토대왕비에 둘러 쳤던 방탄유리창을 열어 비석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언뜻 보기에는 고구려 문화를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세계유산으로 개방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 자유는 한국인에게만은 제한된 것이었다. 전시(戰時)용 왕성인 지안의 환도산성을 둘러보고 내려오던 우리 답사단은 중국의 공안 요원들에게 모두 여권을 제출해야 했다. 호텔에서 여권을 신고했는데 관광 중 또 여권을 검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중국에서는 호텔에 투숙할 때 여권을 검사 받는데, 관광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자신들의 공무 집행 신분증을 제시하며 특별히 여권을 검사하는 것은 고구려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를 압박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고 밖에 볼 수 없다. 산성과 무덤 떼를 관람할 때도 3명의 요원이 앞뒤로 따라다니며 우리 팀을 사진으로 찍고 비디오로 촬영했다. ‘사찰’은 비밀리에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노골적이다.
관광안내책자 통해 고구려사 왜곡 여전
중국은 도대체 왜 이렇게 한국 학자들의 고구려 유적 방문에 신경을 쓰는 걸까? 답은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지안의 호텔에는 방마다 지난해에는 보지 못했던 제법 두꺼운 책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지안시 인민정부에서 낸 ‘중국 지안(中國 集安)’(2004년 6월 발행, 116쪽)과 퉁화(通化)시(지안은 광역시에 해당하는 통화시에 속한 행정구역이다) 관광국에서 낸 ‘퉁화관광(通化旅游)’(2004년 8월 발행, 254쪽)이다. ‘중국 지안’은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4개 국어로 펴낸 것으로 지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지안시에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지난해 이 호텔에 들었을 때는 없던 것으로 올해부터 모든 투숙객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가 컬러판으로 화려한 장정을 한 이 책은 언뜻 사진을 위주로 한 지안시 안내책자 같아 보인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가 깜짝 놀랐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고구려는 정권을 구성하여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대 현도군의 관할 아래 있는 하나의 지방 민족정권이 되었다’는 대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나왔던 주장 같지만 이것은 분명히 한국은 물론 중국의 학술적 연구 성과를 한참 넘어선 내용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학자들은 한국의 고구려 전문가들이 고구려현과 주몽이 세운 고구려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면, 사실을 인정하거나 두 나라 관계를 모호하게 설정하여 슬그머니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런데 중국의 지방정부가 공식으로 펴낸 책자에서 학자들보다 훨씬 과감하게 ‘고구려는 한나라 지방정권’이라고 선전하고 나온 것이다.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국내는 물론 세계에 그것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지방정부의 노력은 집요했다. 지안에서 제법 고급인 찻집에 들어가 비싼 차를 마시고 있는데, 종업원이 지안을 잘 소개했다며 사라고 권하는 책이 있었다. 한글로 된 ‘중국 지안’이었다. 일본 관광객이 오면 일본어판을 내놓고, 아시아인이 아닌 관광객에게는 영어판을 내놓을 것이다. 지안 관광이 끝날 무렵에는 가이드가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와 팔았다. 할당량을 모두 판매해야 한다며 “지안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라며 내놓은 책도 바로 ‘중국 지안’이었다. 188위안(2만5,000원) 짜리 안내 책자를 팔아 “고구려가 중국 역사임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물론 돈 벌이까지 톡톡히 하는 셈이다.
가이드가 팔고 있는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고구려 역사시대 군왕상(高句麗歷代君王像)’이란 36쪽 짜리 책인데 이렇게 얇은 책도 98위안(1만 3,000원)씩이나 받고 있었다. 고구려 왕의 초상화가 실린 이 책은 초상의 고증은 다른 문제로 치더라도 도저히 읽어갈 수 없을 정도로 한글 번역이 엉망이었다. ‘역대’라는 제목을 ‘역사시대’로 잘못 옮긴 것은 물론이고, 본문 내용은 마치 초등학교 가기 전 한글을 며칠 공부한 어린이가 쓴 것과 같았다.
예를 들어 미천왕을 설명하는 대목은 ‘고주가다과의 아들이자 봉상왕의 조긔카로서 이름이 을불 봉상왕이 다고를 죽인 후 을불이 도망갔는데 수실촌에서 하인으로 일햇기도 하고 동츤 츤민과 함께 소금을 판매했기도 하였다. 봉상왕을 페하게 된 후 임금었다. 즉으로 옹립되엇돠 슥위 이후…’ 식이다. 이 책 역시 가이드는 물론 지안 시내 모든 관광지에서 팔고 있었다. 선양공항에서 출국할 때 공항 서점 판매원이 자신 있게 권하는 책도 바로 ‘고구려 역사시대 군왕상’이었다.
“고구려는 고려와 다른 중국의 고대지방정권”
지안 호텔에 비치한 다른 책 ‘퉁화관광’에는 좀 더 구체적인 고구려사 왜곡 작업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와 (왕씨)고려가 다르다는 설명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고구려 역사 개황’이라는 대목에서 ‘고구려 역사에 대하여 흔히 조선반도의 고려 왕조와 혼동하여 같은 것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은 이 두 개의 정권은 연대로 보나, 통치 지역으로 보나 왕족의 성씨로 보나, 속하는 민중으로 보나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른 것이다.
고구려와 고구려 왕조는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다. 고구려국은 우리나라 북방 소수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으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었다. …고구려 국가가 망하고 250년이 지난 뒤 고구려 국가의 유민들은 이미 완전히 원래의 민족적 특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다른 민족에 융합되었다. …고려 왕조는 918년 왕건이 조선반도 북부에 건립한 국가이다. 왕씨 고려정권의 통치 아래 있던 신하와 백성은 남방의 신라인과 후백제인, 또한 전쟁 때 조선반도로 들어간 당ㆍ5대에서 송ㆍ원 때의 한인(漢人)도 포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중국의 노력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의 관광지 영상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www.chinavr.net/jilin/jian)는 지안의 고구려 유적을 소개하면서 ‘고구려 정권은 서기 전 37년 시작하여 서기 668년에 망했는데, 중국 동북지구에 영향이 꽤 큰 소수민족 정권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이트는 또 ‘고구려와 고려는 관계가 없다’는 제목의 글을 특별히 실어 중국 학자들의 말을 인용해가며 ‘왕씨 고려와 고구려는 결코 계승관계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는 고구려 역사를 외국사로 취급해왔는데 사실상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250년 뒤 조선반도에 고려라는 정권이 나타나는데 통치자의 성이 왕씨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왕씨고려라고 부른다. 비록 한자를 그대로 쓰고 있지만 왕씨고려와 고구려는 계승관계가 없다.’ ‘고구려 문화는 중화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24시간 누구나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이 사이트에 나온 글은 고구려가 중국 역사라는 일반적인 논의도 담고 있지만 ‘고구려≠고려’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로 하기 위해서는 주변국 보다 우선 ‘고(구)려는 바로 조선이고 지금의 한국’이라는 자국민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는 계산이 작용한 결과이다. 지금까지 중국인은 모두 고구려사를 당연히 한국의 역사이고 조선족의 역사인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중국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ㆍ전 고구려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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