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세월이 갈수록 더 잘 알게 된답니다. 저의 모델이기도 하고 제 삶의 커다란 일부입니다. 제 삶을 좌지우지하는….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어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처음 보았을 때 인생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답니다. 약동하는 생명의 느낌에 어쩔 수 없이 끌려 왔지요.”
화가 브루스 에이켄(54)씨가 이런 찬사를 바치는 대상은 북극의 오로라와 함께 불가사의한 자연의 하나로 꼽히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다. 이 웅장한 협곡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감탄을 금할 수 없겠지만 에이켄 화백은 벌써 30여 년을 줄곧 여기 살면서 협곡의 자태를 화폭에 담고 있다.
그는 평생 그랜드 캐년 외에는 그려 본 적이 없다.
원래는 마천루가 우글거리는 맨해튼에서 태어나 명문 뉴욕예술대 등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어려서부터 화가인 어머니에게 붓질 하는 법 등을 배웠다. 아버지는 배우였다. 나이 스물 되던 해 예전에 들었던 어머니 고향 애리조나의 대자연을 직접 보려고 서부로 갔다. 수중에는 단돈 18달러와 화구뿐이었다.
그러다 마주친 그랜드 캐년은 처음에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림으로 어찌 해 보기에는 너무도 거대했다. 그래서 협곡의 지질구조, 동식물 현황 등을 공부하며 곳곳을 발로 누볐다. 그럴수록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마침내 1972년 협곡에 정착했다. 지난 28일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두고 “인생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평생 이 대자연을 화폭에 담겠노라고 결심을 한 것이다. 부인 메리씨도 이 때 여기서 만났다. 자녀 셋도 다 이곳에서 키워냈다.
그는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 직원이기도 하다. 관계자가 아니면 협곡 일대에서 거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예 펌프 수리공으로 취직한 것이다. 철제 난간도 고치고 벽돌도 나르고 온갖 힘든 일을 다했다. 집 주면은 붉은 바위가 천 길 위로 솟아 있는가 하면 콜라라도강이 세찬 강물 소리가 들린다. 침대 달랑 두 개지만 사철의 변화가 바로 스며든다.
그는 1년에 12~15개의 풍경화(홈페이지 www.bruceaiken.com)을 그려냈다. 어떤 때는 한 번에 두세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푸른 파노라마’ 연작. 협곡 위쪽 가장자리에서 저 아래 콜로라도강 수면까지를 담은 이 작품들은 생생한 색상에 친근한 세부 묘사, 탄탄한 테크닉 등으로 평론가들로부터 ‘권위적 사실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은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로 2.7, 세로 1.8m짜리 연작 유화가 한 점당 최고 4만5,000달러(약 4,500만원)에 팔리고 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협곡 전경을 구입한다. 그러는 그는 이제 세밀한 부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랜드 캐년은 거대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원시가 살아 있습니다. 난간을 잡고 내려가다 보면 거대한 경치는 이제 눈에 잘 안 들어와요. 그 대신 볼 게 더 많아지지요. 그런 것들을 그릴 겁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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