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노무현 대통령은 ‘당원 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글’이라는 긴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야당이 지역구도 해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 합의해 주면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야당에 넘기겠다”는 대연정 구상이 담겨 있다.
노 대통령의 분권형 대통령제 구상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는 대통령 선거 중에도 지역구도를 깰 수 있다면 대통령의 권한을 양보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연정이란 말은 7월 5일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처음 나왔는데, 7월 한달 동안 거듭 이 구상을 밝히면서 만만치 않은 집념을 드러냈다.
그간의 구상을 정리한 7월 28의 대연정안은 폭탄선언 수준이다. “지역주의를 극복하자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은 정권을 내놓고 한나라당은 지역주의에서 오는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실질적으로는 정권교체 제안이다”라는 내용이다.
대통령의 폭탄선언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다. 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대통령 마음대로 다른 정당에 이양하겠다는 것은 위헌적인 발상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왔다.
한나라당은 “응대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민노당은 “연정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대통령이 안쓰럽다. 차라리 한나라당과 합당을 하라”고 말했다.
여당 안에서도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반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냉전세력’이니 ‘극우보수’니 하고 공격하던 한나라당과 어떻게 연정을 하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극복의 대상이지 연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대통령의 ‘구국적 결단’이 무색할 만큼 냉소적인 반응 일색이다. “지역주의 극복은 나의 정치생애를 건 목표이자 대통령이 된 이유다. 그것은 정권을 내놓고라도 반드시 성취해야 할 가치 있는 일이다”라는 대통령의 호소는 먹혀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명분에 집착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집권 전반기를 지방화와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집념으로 끌고 갔다.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무릅쓰고 그는 행정수도 이전과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밀고 나갔다.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집념이 그의 집권 후반기를 지배한다면, 그래서 대연정론과 같은 무리한 시도가 계속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그는 대연정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하루 만에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고, 대연정은 한나라당에 대한 반대급부로 제안한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온 가장 노 대통령다운 행태다. 지역구도의 병폐가 아무리 심하다 한들 대연정과 같은 위헌적 발상을 무릅쓰면서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싶었다는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해 주겠는가.
지역주의는 오랫동안 망국적인 병폐로 인식되었지만 현 시점에서 위헌을 무릅쓰고 바로잡아야 할 만큼 심각한 지경은 아니다. 또 지역주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 지역감정은 오랜 군사독재 아래 민주주의의 싹을 키워온 뜨거운 저력이었음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 없이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라는 민주투사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순정’을 가진 사람임을 믿는다. 그는 술수나 전략만이 아니라 순정을 가진 정치인이고, 바로 그 점이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여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순정은 열아홉 처녀의 순정과 달라야 한다. 열아홉 처녀의 순정은 오락가락 설레이며 시행착오도 할 수 있지만 대통령의 순정이 그렇게 서투르거나 맹목적이어서는 안된다.
노 대통령은 지금 지역주의 타파에 매달리며 무리수로 시행착오를 할 시간이 없다. 대통령의 폭탄선언에 냉소로 답하는 나라의 분위기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부진은 역량 부족 때문이지 지역구도 때문이 아니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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