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불변의 진리로 여기는 말이다.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 손무(孫武)가 쓴 병법서 ‘손자(孫子)’의 모공편(謀攻篇)에 나온다. 흥미로운 대목은 ‘지피(知彼)’를 ‘지기(知己)’보다 앞세우고 있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아폴론신전 기둥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재미있는 대조를 보인다. 신전의 경구는 '인간은 신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알아라’는 의미라 한다. 손무라면 ‘신을 알고 나를 알면 언제나 위태롭지 않게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을까.
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을 염탐하는 행위는 예로부터 일반화 해 있었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국민을 ‘적군’으로 간주하면서 말과 행동을 염탐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불신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행위다.
안기부 X파일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요동의 외양이 어느정도 가닥을 잡고 있다. 미림팀이 존재했고, 도청이 있었다. 그 도청은 법원에서 통신감청영장을 받아서 한 합법도청이 아니라 불법도청이었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다. 여기까지 이의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공감대는 오랜 세월 존재이유가 부실했던 권력에 대한 투쟁의 과실이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인식이 됐다. “옛날 중정 안기부 X들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하고 다녔구나”하고 흥분할 필요조차 없을 듯하다. 혹 그렇게 흥분하다가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될 것이다.
이번 사건은 ‘불법도청 행위’ 이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과거 나쁜 짓을 했던 사람(혹은 행위)을 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번의 경우 그것을 이용해 또 나쁜 짓을 한 사람(〃), 더 하고 있는 사람(〃)에서 눈을 떼선 안 된다.
행위를 넘어 구체적으로 X파일 속에 들어있던 실체적 내용, 그 내용을 왜곡한 행위, 그것을 개인 혹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 행태 등을 밝히는 데 국민의 관심이 모여 있어야 한다.
근래 대표적 불법도청 사건이었던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이나 2002년 대생인수 로비의혹 사건이 이번 사건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두 사건에서 불법도청의 ‘3인칭 객관자’였던 언론이 이번에는 ‘1인칭 혹은 2인칭 핵심 당사자’로 관여하고 있다는 대목이다.
다음은 ‘불법도청 이후’의 이후. 진부한 얘기지만 ‘권(權)ㆍ정(政)ㆍ언(言)ㆍ재(財) 유착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는 공감대를 확립하는 일이다. 문화일보가 27일 실시한 여론조사는 주목할 만 하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문제점을 물었더니 46%의 국민이 ‘유착’을 지적했다. ‘불법도청’이 다음으로 37%였고(63%가 도청을 용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를 폭로한 언론이 제일 큰 문제라고 대답한 국민은 9%였다. 다른 몇 군데의 여론조사에서도 대동소이게 나타났다. 우리 국민은 이미 지난날보다 현재, 현재보다 앞으로의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유착 등 도청의 내용을 도외시하고 나쁜 짓인 줄 뻔히 알고 있는 도청행위만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의도가 불순하다. 대다수의 국민이 별로 문제삼지 않고 있는 언론폭로에 앙앙불락하는 것도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이런 가운데 검찰이 이른바 ‘독수(毒樹)의 독과(毒果)’ 이론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며 “불법 수집된 증거라도 ‘형상과 내용’이 변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있다”고 밝힌 대목이 주목된다. X파일의 ‘형상과 내용’을 훑고 있는 검찰에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다.
정병진 부국장 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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