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모(60) 전 국가정보원 감찰실장이 “핵폭탄”이라고 비유한 안기부 도청테이프 274점과 13권 분량의 녹취록이 새로 발견돼 안기부 X파일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검찰이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운영(58)씨 집에서 압수한 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경우 그 파장을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어떤 내용 담겼을까 공씨에게서 테이프를 회수해 내용을 분석한 뒤 소각했다고 밝힌 이건모씨는 “한국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는 내용”이라고 ‘테이프의 성격’을 요약한 바 있다.
공운영씨는 “대통령 빼고 다 도청했다”고 방대한 도청 범위를 설명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제작되고 상부에 보고된 테이프들이기 때문에 주로 YS정권이 주시한 정치권 인사, 재벌, 언론사 사주 등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공개된 ‘삼성-중앙일보-정치권’의 거래처럼, 불법자금 수수와 일부 언론의 노골적인 후보 지지 전략 등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공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내가 입을 열면 안 다칠 언론이 없다”고 공언한 바 있다.
또 꼭 거악(巨惡)이 아니더라도 공직자나 정치인, 언론인 등의 사생활도 도청의 대상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YS 정권 시절 일부 고위 공무원의 갑작스런 낙마도 이런 뒷조사의 결과였다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도청내용 공개될까 검찰이 테이프 내용을 공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 즉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29일 오후 전격적으로 테이프 확보 사실을 발표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는 짤막한 발표문을 읽은 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것도 묻지 마라”고 잘라 말했다.
이날 오전까지도 검찰은 “MBC에 테이프 제출을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테이프 입수에 실패한 것 같은 말을 흘리는 등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
하지만 검찰이 공개하지 않더라도 테이프의 존재 자체가 알려진 마당이기 때문에 전 국정원 직원 등을 통해서라도 개략적인 내용이 알려질 가능성은 높다.
검찰 칼끝 어디까지 미칠까 내용을 공개하지 않더라도 검찰은 내부적으로 테이프 내용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 범죄 혐의가 발견되면 수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검 고위 관계자는 “274개 내용을 전부 분석해 컨텐츠에 대한 인지수사 착수 여부를 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불법 수집된 자료로 수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에 대해서도 대검 연구관을 통해 법리 검토에 착수했다. 김종빈 검찰총장도 “테이프 내용을 전부 분석한 후 전 검찰력을 동원해서라도 수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장 일각에선 ‘삼성-중앙일보-정치권’만 수사하는 것은 형평성 시비를 부를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검찰이 인위적으로 형평성을 맞춰 수사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검찰의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이다.
수사를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아직은 안기부의 도청제작과 유출 수사에 집중하고 있다. 황 차장검사는 이날 오후 기자들에게 274개의 테이프 확보 사실을 밝히면서도 내용 수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테이프 등의 제작 및 보관 경위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 진상을 밝히겠다”고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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