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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CEO 퇴직 후 택시 운전/ 인생 2막 연 김기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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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계 CEO 퇴직 후 택시 운전/ 인생 2막 연 김기선씨

입력
2005.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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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요? 죽을 때까지 해야죠. 지금 저한테는 마누라보다 소중한 보물 1호 아닙니까?”

언제까지 택시 운전을 할 거냐는 물음에 김기선(60)씨가 대뜸 한 말이다. 직업이 택시기사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웃음 가득한 얼굴로 휘파람까지 불면서 자신의 택시에 때 빼고 광 내는 모습이 평생 택시일만 해 온 사람과는 좀 다르다.

사실 김씨는 잘 나가던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였다. 39년 동안 금융계에 몸담으면서 명퇴 바람이 불어닥칠 때도 영풍상호신용금고의 사장을 세 차례 연임할 정도로 역량을 인정받은 금융전문가 출신이다. 그런 그가 퇴임을 1년 앞둔 2001년 돌연 회사를 떠났다. 택시운전을 하기 위해서였다.

“노년에는 확 바꿔보자고 다짐했죠. 나이가 들면 사는 일에 재미가 줄어들기 때문에 직업에서 재미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니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더군요.”

김씨는 그렇게 인생의 2막을 열었다. 택시운전은 몸이 허락하는 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 제대로 해 보자는 생각에 친척이 운영하는 택시회사도 마다하고 생판 모르는 회사에 일반 사원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3년을 근무하고 개인택시를 갖겠다는 호기는 처음부터 깨져버렸다. 평생을 사무실에서만 일해왔던 그가 하루 12시간을 꼬박 택시 안에서 지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운전을 별로 안 해본 터라 페달 밟기도 버겁더군요. 발목이 아파 처음 몇 달 간은 침 맞으러 다니느라 돈을 벌 새도 없었어요.” 그래도 3년 동안 결근 한번 안했다.

한번 주춤하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주변의 비웃음도 들리는 듯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개인택시 자격증이 무슨 고시처럼 느껴졌습니다.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에 장학금 타면서 공부하는 기분으로 벼텨냈죠.”

김씨는 1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개인택시를 마련했다. 생활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사납금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취미생활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행복은 승객들을 통해 세상 사는 인생의 맛을 찬찬히 곱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술집아가씨부터 외국인 노동자, 심지어 노름꾼까지 새롭게 만나는 승객마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릅니다. 이들로부터 진정한 행복은 만족하는 삶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죠.” 남들이 볼 때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택시 운전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일이 김씨에게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처음에 냉담하던 아내(김유계씨ㆍ56)도 아침 일찍 나서는 남편의 아침밥을 챙겨줄 정도로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자녀(2남)들도 아버지의 용기를 자랑스워한다.

김씨는 “큰아들(재호ㆍ35)이 항공사 부기장인데, 내가 택시운전을 하겠다고 하니 부자가 하늘과 땅에서 운전대를 잡는다고 웃더라”며 “비행기 운전사나 택시 운전사나 다같은 운전사 아니냐고 맞받아쳐 줬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김씨는 얼마전 이런 새롭고 낯선 일을 선택해 좌충우돌 겪어온 이야기를 엮어 '즐거워라 택시인생’(웅진지식하우스)이란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책에는 택시라는 작은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의 풋풋한 인생 이야기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외국에서는 대학총장이 퇴직하고 그 학교 경비로 다시 취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어디 그렇습니까? 제가 화제가 된다는 자체가 어쩌면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더이상 체면만을 따진다면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 수 없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아 하십시오. 일을 하면서 젊은 시절 잃어버렸던 행복의 조건들을 하나둘씩 되찾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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