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수선하다. ‘안기부 X파일’로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야단법석이다. 한반도 운명을 좌우할 6자 회담이 재개되고 있건만, 지면은 여전히 의혹과 논란, 언론사, 정파 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도배질되고 있다.
그 사이로 비치는 조종사파업, 오리무중의 총기탈취 사건, 서울공대교수 연구비횡령사건, 연정ㆍ개헌 논란 등은 사뭇 빛이 바랜 양상이다. 염천에 들끓는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또 아침이 열리고 있다.
정치는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무소속ㆍ무당파 국회의원들도 있지만, 정치인에게 당파성 초월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정치에도 비당파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다.
국가 비전과 발전전략의 수립은 물론이고, 정보화와 전자정부 구현, 고령사회 대책, 통일대비계획, 균형발전정책 등이 그런 예들이다. 이런 정책들은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당파성이 개입되면 안 하느니보다 못하고 자칫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국민의 권리확대가 최우선
실제 참여정부가 추진해 온 국책 과제들 중에는 정권의 임기를 훨씬 넘는 시간계획을 가지는 것이 많은데, 그 과제들을 누가 끝까지 책임을 질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야당뿐만 아니라 관료 사이에서조차 정권만 바뀌면 끝이라는 식의 기회주의가 번져 있다. 이렇듯 지속가능성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수혜 대상지역이나 집단을 상대로 정책결정을 단행할 경우 내용이 아무리 좋더라도 당파성 시비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는 수립ㆍ추진의 주체와 절차의 비당파성을 먼저 확보되어야 한다.
최근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논란이 된 헌법개정 문제 역시 비당파성 확보가 핵심 관건이다. 본래 정치가 당파적이기 때문에 공동체적 가치질서로서 헌법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바꾸는 것도 의당 비당파적 방법에 따라야 한다. 개정될 헌법에 의해 정권획득에 나설 정파들이 개헌과정을 주도하게 된다면 이는 이해의 충돌을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는 주권자인 국민을 위한 권리확대보다는 정권을 장악한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한 정부형태 선택의 역사였다. 그런 뜻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면 초당파적 기구를 통해 조사ㆍ연구를 맡겨야 한다.
최루탄 연기 속에 탄생한 현행헌법은 1986년 민주화운동의 소산이지만, 충분한 숙의와 여론수렴을 통해 초당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오늘의 정치현실은 87년의 상황과는 현저히 다르다.
가령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책임정치의 구현이나 국가발전전략의 비당파적ㆍ지속적 추진에도 장애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기본권, 지방자치, 사법권, 통일, 경제 및 재정 관련 조항 등 개정 또는 보완해야 할 것이 많고 지식정보사회와 전자정부의 진전에 따른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과거에 그랬듯이 정치일정에 쫓겨 졸속으로 추진하고 국민 대다수의 의사보다는 특정 정파 또는 정파간 야합의 이익을 반영하는데 급급, 개헌을 단행하는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될 일이다.
-초당파적 준비기구 필요
개헌은 마냥 미룰 것이 아니라, 비당파성만 보장된다면, 지금부터라도 착실히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차기 대선은 현행 헌법으로 치르되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개정헌법에 따라 차차기 대선을 실시하도록 못 박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
초당파적 입장에서 향후 선진 한국의 지속가능한 헌정을 위한 규범적 기틀을 닦을 현인들로 개헌준비기구를 구성하여 미리미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조사ㆍ연구와 의견수렴, 개헌안 작성 등 필요한 작업을 추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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