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대표적 소설가가 손을 잡았다. 남의 황석영씨와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북의 홍석중씨가 공동창작에 합의한 것. 20~25일 평양 등지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서 조우한 두 사람은 “서간문이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장르에 구애 받지 말고 함께 글을 쓰자”고 약속했다.
둘의 인연은 16년이나 됐다. 황씨는 “1989년 방북 당시 홍석중씨를 만나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서로 가슴이 열렸다”고 말했다. 나이는 홍씨가 둘 위지만, 문단 데뷔는 황씨가 앞선 ‘애매한’ 사이. 그러나 홍씨는 “할아버지(벽초)가 여덟살 때, 육순의 노비에게 말을 높이지 말도록 했다”는 일화를 들며 말을 놓자고 했다. 21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만난 둘은 친구처럼, 형제처럼 반가운 얘기를 나눴다.
황=나는 50년대 누나들이 빌려온 벽초 선생의 ‘임꺽정’을 어깨너머로 보며 자랐다. 그 문체를 통해 우리 말의 정체성을 공부했다. 그가 없었다면 ‘장길산’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홍 선생이 남쪽 출판사 창비가 주관하는 만해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쾌했다. 문학의 힘이 분단의 벽을 뚫은 사건이었다.
홍=우리는 분리해서 살지 못한다. ‘임꺽정’이 ‘장길산’으로 이어진다. 나는 ‘장길산’의 제일 애독자다. 머리맡에 늘 꽂아두고 읽는다. 그런데 ‘장길산’과 내 소설이 닮은 데가 있다. 우리 문학의 뿌리는 같다.
황=16년 전 혼자 북에 왔는데 지금 남쪽 문인 100여 명이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왔다. 이는 우리가 같은 말을 써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말을 누가, 무엇이 갈라 놓을 수 있는가.
홍=이제 분단문학이란 말은 쓰지 말자. ‘황진이’에 대해 남쪽에서 여러 평가가 나왔는데 대부분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것이 못마땅했다. 내 소설이 우리말을 잘 구사했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황=어떻게 황진이의 폐부 속으로 들어갈 상상을 했는지 대단하다.
홍=우리 둘이 같이 작품을 쓰자. 이젠 때가 됐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았고 떨어져 있어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같이 쓰는 것이 우리 문학이 하나되는 것이다.
황=좋은 생각이다. 둘이 소설을 번갈아 이어가며 쓸 수도 있겠다. 후배들이 남북을 오가며 서로의 원고를 전해주고. 정말 멋진 일이다.
홍=황형이 16년 전 ‘북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썼다. 지금은 남북이 서로를 샅샅이 알고 있다. 문학과 사회생활은 차이가 있지만, 창작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황=작가의 본질은 같다. 통일을 이루는데 문학의 역할이 분명 있다.
홍=요즘 책 나오는 걸 보면 분단을 못 느낀다. 북에서 ‘황진이’가 나온지 한달 반 만에 남쪽 평론가로부터 연락이 올 정도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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