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는 완벽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그게 아니란 것을 알고 차차 실망하게 되는 것 같다.” (고1 남학생)
“중학교 시절, 점점 부모님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굉장히 괴로웠다. 부모님의 불완전함을 몰랐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고3 여학생)
어린 자녀들이 성장하여 십대 후반에 이르면 부모를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인격체로 파악하게 된다. 부모의 언행 하나하나를 두고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판의 날을 세우는 것도 그즈음이다. 청소년들의 심리적 특징은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논리적이어서 부모의 불완전하거나 현실 타협적인 모습은 특히 이 시기의 자녀들에게 실망감과 괴로움을 안겨 주기 쉽다.
한편 이러한 실망의 경험은 성장 발달 과정에서 겪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오히려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 또한 부모의 불완전한 모습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녀들이 정신적으로 부쩍 성숙하게 되는 것이니 오히려 축하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부모님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나처럼 실수도 하고, 고민도 많으시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셨다니, 감사하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러나 부모는 싫든 좋든 무조건 공경하는 것이 자식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자녀에게서 실망감을 넘어 원성을 들을 때 적잖이 당혹스럽다. 애지중지 기른 자식이 부모를 비난하고 거부할 때만큼 속상한 일도 없다.
“나는 부모님이 늘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자라면서 부모님이 가진 욕심과 이기주의를 발견한 순간 어처구니없이 믿음이 깨져 버렸다.”(고2 남학생)
부모가 소탈한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지 않고 도덕군자연하거나 완벽한 인간인 양 살아온 경우에는 자녀가 부모의 실상을 보게 되었을 때 비애감에 휩싸인다. 어떤 학생은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을 늘 깔보고 비웃었던 탓에 세상 사람들은 다 못났고 아버지만 대단한 줄로 알았었다며 쓴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부모님이 너무 불쌍해서 실망했다.”(고3 여학생) “매일 매일이 실망의 연속이다.”(고3 남학생)
이 같은 진술에는 부모의 인격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드러나 있다. 이런 상황은 일상에서의 깊은 실망이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되어 초래된 것인 만큼 관계 회복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학생이 밑줄까지 그어서 강조한 ‘불쌍해서’는 ‘반어(反語)’로 쓰여 ‘형편없다, 한심하다, 경멸한다’의 뜻을 가지고 있음.) 이밖에도 아이들은 부모의 편견, 위선, 허위, 허세, 사치, 위법 등과 관련한 인격적 결함에 대해 ‘표리부동하다, 가면을 썼다, 이중적이다’와 같은 용어를 동원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심지어 ‘오물보다 더럽다’며 극도의 혐오감과 적개심까지 드러내었다. 결국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는 상황에까지 이르면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가지게 된다.
한편 초등학생들은 부모의 교통법규 위반을 실망스러운 사건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위반 사실이 경찰에게 적발되었을 때 벌금을 모면하려고 핑계를 일삼는 부모의 모습은 더욱 창피하다고 진술하였다. 자아분화(부모로부터 정서나 사고방식이 독립하는 것)가 덜 된 자녀들은 부모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곤혹스럽게 느낀다. 부모가 욕설을 하거나 남과 다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동차 운전을 할 때에는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되므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 앞에서는 특히 조심할 일이다. 욕설하는 모습이 멋있게 보인다면 아이들은 부모 흉내를 낼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아이는 실망스러운 부모의 이미지를 가슴에 담게 될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숭늉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자녀에게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완벽하게 살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훌륭한 부모 노릇이란 이상으로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살림살이에서 먹고사는 일 자체가 생존의 과제일 때 아이의 불만 따위에는 귀를 기울일 여력이 없을 때도 많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때 정말 가슴이 아팠고 실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서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고1 남학생)
필자는 어릴 적에 하꼬방이라 불리는 무허가 판잣집에 팔 년을 살면서 해머 망치에 두들겨 맞아 집이 폭삭 주저앉는 모습을 일곱 차례나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새롭게 일어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안도하고 감사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지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 역시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잘못된 점이 있을 때 소탈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며 성실하게 노력하?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신규진ㆍ서울 경성고 상담전문교사ㆍ‘가난하다고 실망하는 아이는 없다’ 저자 sir90@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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