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中情 간부 "김지태 구속 지시받아"
국정원의 과거사건 진실규명위는 22일 부일장학회 헌납과 경향신문 매각 사건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관련자 진술, 국정원 문서 등에 근거해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릴 만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물적 증거 없어 정치적 논란의 소지도 있다.
부일장학회의 경우 박 전 대통령(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장학회 설립자인 김지태씨에 대한 수사와, 장학회 재산 처리 과정에 모두 관여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가 중정의 수사대상이 된 과정에 박 전 대통령이 관여했다는 증거는 두 가지가 제시됐다. 첫째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장 박모씨가 2000년 4월 한 기고문에서 “1962년 정초 연휴간 부산을 방문한 박 의장을 독대한 자리에서 김지태 구속수사 지시를 직접 받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 지부장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기 직전에 작성된 부산지부의 ‘정치인 실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는 김지태씨에 대해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긍정 평가를 받고 있다”는 등 호의적으로 기술돼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정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없이 단독으로 김씨를 수사했을 가능성은 적고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박모씨가 태도를 바꾼 것”(진실위 한홍구 위원)이라는 게 진실위의 추론이다. 그야말로 정황증거인 셈이다.
헌납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도 박 전 대통령이 개입했다. 진실위는 이날 “당시 박 의장은 ‘기부 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고원증(전 법무장관)에게 5ㆍ16장학회 설립을 지시하고 장학회 설립 이후에는 이사진을 직접 선임하는 등 장학회 운영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고원증씨에 대한 직접 면담조사 실시를 통해 이 같은 진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진실위는 또 장학회의 이사진과 장학회 소유 언론 3사의 사장에 주로 대구사범 출신 측근들과 친인척 등이 임명됐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경향신문 매각 과정도 마찬가지다. 진실위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서울분실장 백모씨등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당시 중정 간부들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경향신문 문제에 대해 지시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는 사실을 들었다.
진실위측은 또 “62년 천주교유지재단이 경향신문의 매각을 추진하자 박 의장이 자신과 친분이 돈독한 시인 구상을 내세워 경향신문 인수를 추진해 매매계약을 체결했다”며 “그러나 천주교측은 자금원이 박 의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계약금 3억환을 돌려주고 계약을 파기한 사실이 있다”고 밝히며, 이도 박 전 대통령 개입의 근거로 삼았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 "김씨 석방대가 헌납 강요" vs "사장 간첩혐의 씌워 압박"
국정원 진실위가 22일 밝힌 1962년의 부일장학회 헌납 과정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가 주도적으로 개입해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진실위에 따르면 부일장학회의 헌납 과정에는 중정과 최고회의 등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했고, 특히 중정은 수사권을 남용해 재산헌납을 강요했다.
1962년 3~4월 중정 주도로 이뤄진 부산일보 임직원들과 김지태씨의 처 송혜영씨의 잇따른 구속은 김씨에 대한 압박이었고, 같은 해 4월 24일 구속돼 7년형을 구형받은 김씨가 포기각서(5월 25일)와 기부승낙서(6월 20일) 제출 직후 석방된 과정에서 장학회 헌납 강요와 면책 제안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이었던 박모씨가 후에 번복하긴 했지만 박 의장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고, 박 의장의 지시 직전에 작성된 보고서에는 김지태씨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기술돼 있다. 전 부산문화방송 사장인 김종환씨도 “주연은 박정희이고 조연은 황용주와 국제신보 사장이었다”고 증언했다.
경향신문 강제매각 과정에서는 중정의 ‘레드 콤플렉스’ 부추기기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1964년 계엄당국은 경향신문의 ‘허기진 군상’ 시리즈와 ‘3분(粉) 폭리’ 내막 기사 등이 북한의 언론에 인용된다는 이유로 이준구 사장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중정은 같은 해 12월 윤우현 동경지사장 월북과 이듬해 5월 이형백 체육부장 등이 연루된 간첩사건을 빌미로 이 사장을 또다시 구속했고, 검찰은 이 사장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이 사장은 2심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 받고 풀려났다.
진실위측은 “실체도 불분명한 간첩사건으로 이 사장을 압박하려 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정은 강제매각의 결정적 계기가 된 채권단의 대출금 상환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당시 경향신문의 총 채무(4,627만원)가 비슷한 규모의 다른 중앙일간지보다 훨씬 건실했는데도 중정이 대출금 상환을 압박했던 것이다.
중정은 또 이 사장측이 갖고 있던 예금에 대해 조총련 연계자금이라는 이유로 지불을 정지시킴으로써 아예 경향신문 경매에 응찰조차 하지 못하도록 했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 故 김지태씨 유족측 "당장 소송 뜻 없어"
“부일장학회 헌납은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이뤄졌다”는 국가정보원 진실위의 발표에 따라 후신 정수장학회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장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부일장학회 소유자였던 고 김지태씨 유족들이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소송은 ‘시효’라는 장애물을 두고 있다. 유족들이 소송을 낸다 해도 소멸시효가 중단됐는지, 중단됐다면 언제까지인지 등 법적 논란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국정원 진실위측은 “원인무효소송과 헌납취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헌납취소는 시효가 이미 지났다. 원인무효소송에 대해서는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고 김지태씨의 장남 김영구(69)씨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소송 문제는) 일단 두고 보겠다”며 당장 소송에 나설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현재 유족과 시민단체 등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재단 명칭을 변경하고, 재단 이사진을 재편해 명실상부한 공익법인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정수장학회를 고 김지태씨의 유지를 되살릴 수 있도록 쇄신해야 할 것”이라는 진실위의 건의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정수장학회 이사장인 최필립씨는 이 같은 요구를 최근 거부한 바 있다.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정치적 타협의 가능성이다.시민단체들은 정수장학회 이사진이 여전히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가 정치적 결단을 내리면 장학회의 사회 환원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95년부터 이사장을 맡았던 박 대표는 올 초 이사직을 내놓았고, 법적으로는 장학회와 아무 관련이 없다. “내 손을 떠난 문제”라고 해버리면 논란은 헛바퀴를 돌 수밖에 없다.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 부일장학회 헌납사건 결과발표/ 朴 대표 "…"
22일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의 부일장학회 헌납사건 조사결과 발표를 접한 정치권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얼마 전까지 부일장학회의 후신인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때문이다.
박 대표는 무시가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한 듯 일절 언급이 없었다.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은 “발표내용을 보니 확실한 증거도 없는 추정 수준”이라며 “박 대통령이 지시했다는 증거가 없는 데도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걸 보면 의도야 뻔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유 실장은 “박 대표가 직접 대응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맹형규 정책위의장은 여당의 박 대표의 사과요구에 대해 “부적절한 정치공세”라고 잘랐다. 그러나 더 이상 적극 대응할 경우 박 대표를 과거사 논란의 중심에 세우려는 여권의 의도에 말릴 수 있다고 보고 논평을 내지 않는 등 수위를 조절했다.
열린우리당은 공세에 열을 올렸다. 전병헌 대변인은 “박 대표는 과거 강탈행위에 대해 고 김지태 사장과 유가족,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전 대변인은 “박 대표는 얼마 전까지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맡아 거액의 월급을 받다가 진상조사가 시작되자 그만뒀다”며 “박 대표는 여전히 정수장학회의 실질적인 운영과 관리에 절대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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