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종중 회원으로 인정한 21일 대법원 판결은 남녀평등 같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미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굳어진 법적 규범도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확인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종중은 성문법에 그 개념을 규정한 조항이 없는 사회 통념에 따른 조직이다. 대법원은 1958년 ‘성인 남성만이 종중을 구성한다’는 입장(판례)를 내놓아 여기에 성문법적 효력을 부여하고 이 같은 입장을 줄곧 고수해 왔으나 47년 만에 ‘사회의 변화’를 인정해 스스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대법원은 그 동안 종중을 ‘관습상의 단체’로 규정하면서 ‘공동선조의 분묘(墳墓) 수호와 제사, 종원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하여 공동 선조의 후손 중 성년 남자를 종원으로 구성되는 종족의 자연적 집단’이라고 정의해 왔다.
대법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공동선조의 후손 중 남자는 성년이 되면 당연히 종원이 되는 것을 ‘관습법’으로 인정하고 성년 여성에 대해서는 종중 구성원의 자격을 부정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번에 “산업화가 시작된 1970년대 이후 우리사회의 환경과 국민의식 변화로 사회구성원들의 (종전 관습에 대한) 법적 확신이 약해졌다”며 ‘관습의 변화’를 선언했다.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 원칙에 따라 가족 내에서 남녀가 차별 받지 않는다”는 ‘법적 원칙’도 천명했다.
대법관 13명 중 별도 의견을 낸 6명은 파기환송 이유에 대해 “여성의 경우 가입을 원하는 사람만 종중원이 돼야 한다”는 밝혔지만, 원칙적으로 기존 남자 중심의 종중 문화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위해 무려 3년 반을 고민했다. 반세기 가까이 고수해 온 스스로의 입장을 뒤집는 데 대한 부담에다 대법원의 판례에 입각해 이뤄진 숱한 사회적 계약관계들이 새 판례로 혼란을 겪을 게 뻔한 상황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대법원은 2003년 12월 사상 최초로 공개변론을 열어 원고와 피고,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고 이 문제 연구를 맡은 한 부장판사는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 여론조사 결과 일반인의 70%와 전문가 집단의 64%가 ‘남성만 종중원’이라는 관습에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고 대법원은 밝혔다.
이번 판결로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판결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이번 판결 이전에 일어난 종중 관련 행위는 모두 유효하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승소해 종중원 자격을 얻은 용인 이씨 여성들도 이미 과거에 나눠진 종중의 재산분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설명이다.
사실상 재산상 권리를 얻기 위해 회원 자격을 다투는 소송을 냈던 여성들은 거세게 반발할 것으로 보인다. 남성에게만 재산을 나눠주는 현실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법이 그렇다”는 이유로 침묵했던 여성들의 사회적 박탈감이나 배신감도 적지않은 전망이다.
다만 앞으로 전국의 모든 종중은 여성을 회원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향후 벌어지는 총회나 대표자 선임, 재산처분 등 종중의 각종 법률행위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대폭 커질 것으로 보인다. 종중의 명부라고 할 수 있는 족보도 남성 중심으로 기재돼 있는 경우가 많아 대폭 손질이 불가피하다.
원고측 대리인인 황덕남 변호사는 “이번 판례는 양성평등의 측면에서 여성의 지위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의미가 크지만 여성들도 제례나 분묘수호 등 종중원으로서의 의무를 져야 하는 부담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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