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25일, NGO인턴쉽 프로그램으로 ‘이라크 파병 반대’라는 일본어 대형 현수막이 걸린 피스보트에 몸을 싣고 98일간 지구여행을 했다. 당시 피스보트는 바다 위의 작은 마을이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의 홈스테이, 인도 뭄바이에서의 WSF(세계사회포럼), 나미비아 사막에서의 캠프, 브라질에서의 농촌 방문 등 기항지에서의 다양한 경험도 인상에 남아있지만 배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많은 보람은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배에서 만난 일본 친구들은 피스보트에서 얻은 소중한 수확 중의 하나였다.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서 나는 ‘남’이란 인식을 벗었다. 나 스스로 갖고 있던 ‘개인주의 일본인, 경제동물 일본인’이라는 편견이 사라져 버렸다. 그들과의 교제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한국과 일본의 예민한 관계는 물 위에서나 땅 위에서나 여전했다. 한일관계, 특히 신사참배, 교과서 왜곡, 2002한일월드컵 등의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할 때며 어김없이 첨예한 대립구도를 그렸다. 해결책을 도출할 수는 없었지만 그 토론은 우리에게 ‘이해의 시간’이었으며 ‘되돌아 보는 기회’였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왜곡된 정보들을 삭이고 서로 알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절절히 느꼈다.
기항지의 인상도 이에 못지 않았다. 칠레의 발파라이소의 반전 이벤트. 배에서 함께 했던 2주일간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친구들과 함께 ‘인류를 위한 반전 이벤트’를 우리 힘으로 함께 치렀다. 칠레 시민의 뜨거운 호응을 보며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이의 소망을 가득히 느낄 수 있었다. 온 몸으로 인류애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피스보트는 이렇게 이해와 평화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안겨 주었다. 국경을 넘어 열린 시민 토론회에 참여하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랬다. 다행히 한국과 일본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다음달 공동의 배를 띄운다고 하니 설렘이 새삼 가슴에 닿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민할수록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법. 나는 기꺼이 이 고민에 동참할 것이다.
아시아의 3대 국가, 한국과 중국, 일본의 갈등과 협력은 우리 젊은이들의 운명이며 숙제일 수 밖에 없다. 이번 Peace & Green Boat에서 정체되고 퇴영해 가는 국가주의 개념을 훌훌 벗고 ‘우리’라는 공동체로 어우러질 것을 기대한다. 다투어 낮은 곳으로 흐르다 보면 바다라는 큰 공간을 이루는 물과 같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이해하는’ 이번 여행이 아시아 비젼의 서막이 될 것임을 믿는다.
최윤영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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