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로 난더후투(難得糊塗)라는 말이 있다. ‘(똑똑한 것보다) 멍청해지기가 더 어렵다’는 뜻으로, 비록 알아도 아는 것을 쉽게 드러내거나 따지지 않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중국이 일부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이념논쟁에서 휘말리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 전문가들도 있다.
이런 처세는 정치인에겐 필수적이다. 그래야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지지자로 만들고, 사회적 통합도 추구할 수 있다. 본심을 항상 곧이 곧대로 까발리는 사람 주변엔 똑같은 사람만 모일 뿐이다. 마키아벨리의 지적대로 ‘외양’과 ‘상징’, ‘적당한 숨김’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게 현실 정치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치인은 서생(書生)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상황 파악은 칼날같이 하되 언행은 유연하게, 합목적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을 더 간단히 말하면 “정치인은 입조심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무조건 말을 줄이라는 게 아니다. 자기 속을 먼저 내보이는 성급한 언사나 ‘절대’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극단적 발언, 상대를 적으로 만드는 원색 비난 같은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정치의 ABC다.
이 기준에서 볼 때 현 정권은 아주 특이하다. 쟁점이 생기면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매도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대통령이하 총리, 청와대 참모, 여당 의원들의 말이 절제됐다고 보는 국민은 드물다.
하지만 정권의 말이 정치적 공방이 아닌, 냉소나 우려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개성으로만 봐주기 어렵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聯政)론이 그랬다. 윤광웅 국방장관을 유임시키고 싶었으나 여소야대 속에 야당이 제출한 해임건의안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노 대통령은 해임안이 부결되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연정을 외쳤다.
그러나 야당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대통령이 두 번이나 공개 서신을 띄워 당위성을 설파하고, 내각 구성권 이양이라는 조건까지 내건 데 비쳐보면 민망한 결말이다.
연정은 현실성이 희박했다. 지금의 국정상황에서 연정론 제기가 합당한가 하는 논란은 둘째 문제다. 정권이 임기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시점에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야당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20%대를 맴돌고 있는 정권과 한 배를 탈 것으로 봤다면 오산이다.
민노당과 민주당이 각각 연정에서 얻을 것이라곤 당 정체성 혼돈과 지역기반 잠식, 그리고 장관 몇 자리 뿐이라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이 야당의 기류를 먼저 탐문해 보는 건 어땠을까.
“헌법만큼 고치기 힘든 부동산 대책을 만들겠다”는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은 평소 성적(정책 능력)도 과히 좋지 않은 학생(정권)이 “이번 시험에선 전교 1등을 하겠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을 연상시킨다.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처럼 완벽한 대책이 가능했다면 투기문제가 이 정권까지 넘어왔을까. 호언장담부터 하는 태도에서 믿음 보다는 다음달 정부 대책이 발표됐을 때 시장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지 걱정이 앞선다.
그토록 내세웠던 ‘시스템 인사’를 영남권 낙선자 봐주기로 스스로 뭉갰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미국에) 얼굴을 붉힐 땐 붉히겠다”고 천명했지만 아직 변변히 얼굴을 붉혀보지 못한 정권이다. 정권의 말이 앞서고, 그것이 자꾸 희화화하는 것을 보는 국민은 민망하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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