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가 망하고 오대십국 혼란기를 수습하던 후주의 세종이 급서하여 제위는 7세짜리 아들 공제에게 넘어갔다. 이 틈을 타 주변 국가들이 진공하려 한다는 소식에 후주의 정예부대인 금군이 출전하게 됐다. 그런데 어린 임금을 불안히 여기던 장병들은 전공이 뛰어나고 인망이 두터운 조광윤을 받들어 제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송나라 태조이다.
조광윤은 출전 환송연에서 술에 취해 자던 중, 친동생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칼을 들고 침소에 들이닥쳐 강제로 천자의 용포를 입혀 졸지에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이것이 송 태조의 의중을 알아차린 측근들과 그가 벌인 연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하간 송 태조는 후주의 왕실과 고관들을 보호했고, 민간에도 일체의 피해가 없도록 해 나라는 바뀌었지만 큰 혼란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송 태조로서는 이렇게 황제를 추대할 수 있는 막강한 군이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종래에 지방에서 할거하던 군사조직인 번진을 축소하고 중앙에 정예병을 집중하려 했다.
번진은 실질적으로 독립된 권력을 행사하며 세습되었고, 그 결과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아 장기간 정국 혼란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었다. 태조 이후 황제들도 충실히 이 정책을 지속해 번진들은 그 수장이 문신으로 교체됐다. 결과적으로 군이 사유화되거나 지방화되는 경향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그러나 지자(智者)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랄까…. 한 가지 폐해를 고치려 하다 조금이라도 지나친 부분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 반작용이 나타나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 보다.
송 태조로서는 전혀 뜻하지 않은 폐단이 생기게 되었는데, 즉 지방에 변란이 있을 경우 중앙에서 정예병을 보내느라 대처가 늦어지고, 각 분야에서 문신 우위 현상이 지나치게 되어 군사 방면에는 무능, 무지한 문신들이 전략을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정부조직이 굳어졌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송나라가 잦은 외침에 시달리게 된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게다가 매년 문과를 보는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문관들이 스스로 책정한 높은 봉급과 여러 우대조치는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하였기에 다시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요즘 주말 안방극장에서 두 편의 시대극이 인기가 높다고 한다. 우연히 두 편을 번갈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송나라 이야기까지 나가게 됐다. 이번 휴가 때는 기회가 되면 이충무공 전적지를 참배하고 싶다.
박성진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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