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막이 올랐다. 여주인공 선녀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 중앙에서 노래 ‘6시9분’을 시작했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선율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숨죽인 객석의 시선은 무대 우측을 비추는 또 다른 스포트라이트를 향했다. 그곳엔 배우 대신 수화통역사 고경희(35ㆍ여)씨가 서 있었다. 선녀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가자 고씨의 손과 발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노래 가사의 내용을 전달했다. 관객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뮤지컬에 몰입했다.
19일 밤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 그린’에선 특별한 관객을 위한 소중한 공연이 열렸다. 인기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학전극단)의 2,700회 공연을 기념해 극장 측에서 청각장애인 106명을 초청해 마련한 뜻 깊은 자리였다.
1994년 5월 첫 공연을 시작한 이래 뭇 사람을 웃고 울린 ‘지하철 1호선’엔 무려 54만명의 관객이 ‘탑승’했다. 하지만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에겐 머나먼 동경의 대상이었다. 노래와 음악이 주가 되는 뮤지컬을 눈으로만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온전히 청각장애인을 위한 공연이었다. 수화 통역사와 한글자막 덕분에 공연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관객은 “귀가 뻥 뚫린 기분”이라며 마냥 기뻐했다.
노래 가사나 대사만 온전히 이해한 게 아니다. 밴드가 무대에서 연주할 때마다 조명을 비춰 장애인들이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수화통역사 고씨는 밴드가 등장하면 드럼을 치는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색소폰 음악이 흘러나오면 연주 흉내를 내는 등 부지런히 어깨를 들썩이며 무대 분위기를 오롯이 전했다. 록 음악의 매력을 몸소 느끼면서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었다.
촉각이 유난히 발달한 청각장애인들은 객석까지 전달되는 울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양손으론 좌석을 꼭 붙잡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강한 비트의 전자 사운드가 의자를 진동 시킬 때마다 관객들은 그 느낌에 전율했다. 관객들은 공기를 통해 얼굴에 느껴지는 떨림 마저 놓치지 않았다.
2시간 30분의 공연이 막을 내리자 관객들은 자신은 들리지 않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배우들에게 바쳤다. 함박 웃음과 함께.
공연을 관람한 박태호씨는 “비록 들을 순 없었지만 매우 시끄러웠을 록 음악의 분위기를 몸으로 눈으로 충분히 느꼈다”며 흐뭇해 했다.
한국농아인협회 서현정(32) 대리는 “청각장애인은 한글자막이나 통역사의 도움 없이 영화나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특히 한국영화는 자막이 없어 외화보다 관람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지적했다. 협회는 지난해 10월 한국영화에 자막을 삽입하자는 방안을 담은 영화진흥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국회의원 40명이 법안을 발의, 현재 계류 중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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