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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특별전/ 우리땅, 그 굳건한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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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특별전/ 우리땅, 그 굳건한 역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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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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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를 통해 우리 땅과 우리 역사 사랑을 불러일으킬 ‘아! 대한민국 COREA!’ 전시회가 15일부터 9월 14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 1층 로비전시장에서 열린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중국의 역사 왜곡으로 영토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이번 전시회의 의미가 각별하다.

한국일보사가 경희대와 함께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이번 고지도 특별전에는 경희대가 5월 개관한 국내 첫 고지도 전문박물관인 혜정박물관 소장품 중 15세기 이후 서양고지도 60점이 선보인다. 이 가운데 지도 실물은 18점. 나머지 42점은 보안 문제로 사진 복사본 형태이다.

전시는 모두 5개 주제로 나눠져 있다. 첫 주제는 ‘코리아-우리 땅과 이름의 역사’. 16세기 중반부터 서양고지도에 본격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한반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16세기 후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17, 18세기 벨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지도제작자들이 한반도를 어떻게 표기했는가 보여준다. 특히 16세기 후반 벨기에에서 만든 ‘일본열도지도’는 유럽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만 따로 그린 최초의 지도다.

이어 ‘북방영토-대륙의 관문, 민족의 터전’은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의 북방영토가 우리 삶의 중요한 무대였음을 보여준다. 18, 19세기 초반의 숱한 서양고지도들은 압록강 북쪽 봉황성 일대에서 시작해 두만강 위쪽으로 조선의 국경을 표시하고 있다. ‘제주도-대양을 향해 열린 우리의 창’에서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제작된 서양고지도에 도적섬(Lardones) 풍마(Fungma) 등으로 표기됐던 제주도가 하멜 표류기 이후 켈파트(Quelpaert)로 바뀌어 널리 알려진 과정을 알 수 있다.

또 ‘울릉도와 독도-동해에 우뚝 선 우리의 기상’에서는 서양인 대부분이 울릉도와 독도를 한데 묶어 조선의 영토로 인식했다는 증거를, ‘동해, 코리아해-영원한 우리의 바다’에서는 17세기 초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지도를 시작으로 동해가 한국해 또는 동해로 줄곧 표기되어온 상황과 19세기 중반 일본이 유럽과 교류를 확대하면서 이 표기가 일본해로 바뀌는 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김범수 기자 bskim@hk.co.kr

■ 간도·독도…고지도 보니 한국영토

고지도는 영토 영유권을 놓고 국가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 사료 가치가 빛을 발한다. 고래로 누구의 땅이었는가를 밝혀주는 데 지도만큼 결정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독도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이 간도 영유권 문제로 확대됐을 때, 세간의 관심이 고지도에 쏠린 것도 이 때문이다.

‘독도는 한국땅’ 고지도 셀 수도 없어

고지도 연구가로 널리 알려진 이진명 프랑스 리옹대 교수는 4월 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교류센터가 주최한 ‘세계 속에서 독도와 동해 바로 알리기’ 학술대회에서 각국의 고지도 수십 장을 제시하며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뺏기기 이전인 1920년대까지 서양의 모든 지도가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한국에 속한 것으로 분류했다”고 발표했다. 올해 초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제정했을 때도 국내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독도가 한국 땅임을 증명할 방법은 수 없이 많다”며 역시 고지도들을 중요하게 들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문을 내세운다. 제2장 제2조 (a)항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켈파트(Quelpart)와 해밀튼 항구(Port Hamilton)와 다줄렛(Dagelet)과 같은 여러 섬을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과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대목에 독도가 포함돼 있지않다는 것이다. 켈파트는 제주도, 해밀튼 항구는 거문도, 다줄렛은 울릉도이다. 조약문이 허술한 데다 새로 영토를 표시한 지도 한 장 없어 이것이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증명자료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특히 목포대 정병준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대일평화조약문서철에서 발굴한 영국지도 자료는 당시 국제사회가 독도를 분명히 한국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51년 3월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에 쓰려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이 제작한 지도에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 해역에 제주도 대마도 울릉도 독도를 표기한 뒤 국경선을 그어 제주도와 울릉도 독도는 한국 영토로,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구분했다.

조선 땅이던 간도, 일제가 불법으로 넘겨

고구려 땅이었던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간도 땅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된 것은 청 왕조가 선조의 발상지라며 봉금지대를 선포한 이후부터다. 18, 19세기 서양 고지도들은 대부분 이 지역을 중국이나 한국 어느 쪽의 땅도 아닌 말 그대로 출입이 금지된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강을 건너 간도를 드나들었고, 19세기 말부터는 이곳에 집단 거주하면서 행정권까지 확립하는 등 이른바 실효적 지배상태를 유지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청 왕조는 국경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일방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설치하고, 이 비문에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썼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드러난 발단은 이 토문강이 어느 강이냐 하는 것이다. 중국은 두만강의 다른 이름이라 하고, 국내 학자들은 백두산 부근의 쑹화(松花)강 지류라고 해 주장이 엇갈린다. 답을 풀 실마리 역시 지도에 있다.

서지학자인 고 이종학씨가 수원시에 기증해 현재 선경도서관에 보관중인 ‘백두산 정계비 부근 수계(水系) 답사도’에는 백두산정계비에 쓴 것과 똑 같은 이름의 토문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해 곧장 북쪽으로 흘러 쑹화강에 합류하는 모습을 자세히 그려 놓았다. 만주철도부설권 등을 얻는 대가로 일본이 중국에 간도를 넘겨주기로 한 간도협약 체결 한 달 만인 1909년 10월 통감부나 군부대 등이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지도는 일제가 간도를 넘겨 주기 전은 물론 그 이후까지도 일관되게 간도를 조선땅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서양 고지도에는 한국해 표기가 다수

‘일본해’ 표기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해’ 문제 해법도 고지도에서 출발한다. ‘동해’ 표기를 ‘한국해’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술사학자 이돈수씨는 “한반도를 그린 서양고지도 400여 점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동해식 표기는 7%에 불과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한국해로 표기하고 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에 어떻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느냐 하는 것인데 ‘한국해’야말로 국제사회에 설득력과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표기명”이라고 말한다.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이 영국 국립도서관 소장 지도 중 동해 해역을 담고 있는 16∼19세기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의 고지도를 조사한 결과, 64점이 ‘한국해’, 9점이 ‘동해’, 8점이 일본해 등이었다.

하지만 ‘동해’ 표기 확산을 주도하고 있는 이기석 서울대 교수 등은 “서양 고지도에 ‘한국해’ 표기가 많이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외국인들이 만든 외래지명일 뿐”이라며 “국제수로기구 등은 해당 국민들이 사용하는 명칭을 가능한 그대로 표준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어 '동해'를 앞세워야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범수 기자 bskim@hk.co.kr

■ 김혜정 관장 "지도는 소중한 문화유산"

“지도는 당대 최고의 예술과 과학이 결합한 문화 유산입니다.”

‘아! 대한민국 COREA’ 를 주관하는 김혜정(金惠靜ㆍ58) 경희대 혜정박물관장은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평생을 보냈다. 일찌감치 20대부터 고지도 수집을 시작해 지금까지 14~20세기의 동ㆍ서양 고지도 900여 점을 모았으며 올 5월 경희대 수원캠퍼스에 이 지도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을 설립했다.

그가 소장하고 있는 고지도는 300여 점을 소장한 대영박물관, 14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미국 남가주대(USC)를 훨씬 넘는 세계최대 규모.

“일본 도쿄(東京)에서 대학 다닐 때 간다(神田)의 고서점에서 옛 지도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림 못지않은 옛 지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지도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도를 찾는 일이라면 세계 어디든 달려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으로는 거의 해마다 수집여행을 했고 베이징(北京)은 60회 넘게 방문했다. 고지도 한 점을 얻으려 여섯 차례나 비행기를 타고 찾아갔고, 그 때마다 값이 올라간 경우도 있었다.

“우리나라는 지도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지도의 가치는 제작한 사람, 출판사, 국가 등에 따라 매우 커집니다. 어떤 지도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가치가 있지요.” 그는 2002년에 미국 의회도서관이 ‘아메리카’ 명칭이 처음 표기된 1500년대 지도를 사려 독일인 소장자에게 1,700만 달러를 제시했다가 거절 당한 사례를 들었다. 지금 그 소장가는 3,000만 달러에도 팔지않는다고 했다.

김 관장은 고지도를 수집하면서 많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다. 시대에 따라 지명과 지형이 바뀌고 국가도 생겼다 소멸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일동포 3세로서 자신의 정체성도 찾게 됐다. 특별히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 지도를 많이 모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는 세월이 흐르면 자칫 잡동사니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잡동사니를 버리지 않아야 문화가 축적됩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유럽을 찾는 이유는 곳곳에 이런 잡동사니 문화가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그는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도 지도 같은 잡동사니를 연구하는 데서 나온다”며 “버리는 문화를 버려야 문화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바로 지금이 중국과 일본을 잘 연구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고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고도 했다. “옛 지도들을 죽 훑어보면 ‘조선해’가 1820년을 기점으로 해서 ‘일본해’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100년이 지나면서 완전히 ‘일본해’ 표기 지도들만 남고, 조선과 만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사 왜곡에 잘 대처해야 100년 뒤에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즘 나오는 한국의 지도들도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이 것들도 역시 100년, 200년이 지나면 그 의미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박물관내에 자신이 평생 모은 지도와 그림, 고서 등을 보관할 수 있는 60여 평의 수장고를 확보한 것이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수집가는 미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람들은 저를 바보라고도 하지만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많아야 똑똑한 사람이 많은 우리 사회가 균형을 잡게 됩니다.”

68년 도쿄공립여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마케팅연구소와 입시학원을 경영하기도 한 김 관장은 84년 귀국해 강남에 혜정사료관을 운영해왔으며, 2000년 동국대를 거쳐 2001년부터 경희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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