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단의 양대 동인(同人) ‘시힘’과 ‘21세기전망’이 합동 앤솔러지를 펴냈다. ‘세상에 없는 책’(작가 발행)이다.
1920년대 ‘폐허’ 동인들은 “오직 같은 자만 같은 자를 이해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같은 자’의 출현을 기구(祈求)하며 전진할 뿐”이라며 그 도도한 자의식을 천명한 바 있다. 동인의 활동공간이 그 때와 다르고, 문학행위의 의미를 두고 왕왕대는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태생적으로 문학적 경향과 지향의 ‘대타(對他)적 다름’에 뿌리를 둔 이들이 동인지를 함께 묶는 일은 극히 드문 예다.
‘시힘’은 민중적ㆍ서민적 삶의 정서에 뿌리를 두고 전통적 서정성을 살려나가자는 지향으로 84년 결성된 동인. 양애경 김백겸 김경미 고운기 안도현 정일근 최영철 박철 나희덕 이윤학 박형준 김수영 이대흠 문태준 이병률 김선우 김춘식 등이 활동 중인 면면이다.
반면 ‘21세기 전망’은 대중문화와 시의 결합, 즉 “시 정신이 문화적 힘의 근간이 돼야 한다”는 ‘대중적 전위주의 선언’으로 89년 첫 모임을 가졌다. 윤제림 허수경 함민복 박용하 차창룡 함성호 이선영 김소연 심보선 윤의섭 연왕모 등이 그들이다.
이번 책은 ‘시힘’의 제안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나름의 자기 점검이 필요했다고 할까요. 바깥에서 보는 ‘시힘’의 성과나 역할 등을 점검하고, 더불어 이 시대 동인의 존재의의와 필요성에 대한 고민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문태준) “우리 역시 새로운 모멘텀이 절실했습니다. 근년 들어 동인지 출간도 뜸했고, 동인 차원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돼온 상황이었거든요.”(차창룡)
책에는 두 동인들의 작품 외에 ‘반시’의 김명인 시인과 ‘오월시’의 최두석 시인, ‘시운동’의 이문재 시인 ‘천몽’의 진수미 시인이 쓴 동인 활동에 대한 추억담, 두 동인들의 좌담(‘서로를 말하다’) 내용도 실렸다. 해서, 책은 이 시대 동인 시 활동의 연원과 성취를 정돈하고 고민과 숙제를 공유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시적 발언이 다양하게 분산되는 시대에, 이 다양성을 묶어서 집단화한다는 게 필요한 일인가”(사회:권혁웅) “시 잡지도 많고 발표지면도 풍부해졌지만, 시가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는 드뭅니다.”(차창룡) “기능적인 면에서 자기들이 지닌 시적인 것들을 완벽하게 갖추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고운기) “세계는 다르지만 충분히 인정해줄 수 있는 어떤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같이 간다는 것”(함성호) “각자의 참호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전투를 하지만, 내가 지금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의식을 동인이 줄 수 있으니까요.”(나희덕)
동인의 동력이 대타적 다름에 근거한 내적 결속 뿐 아니라 그 내부의 ‘다양성과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평론가 김춘식씨는 책 머리의 ‘주제비평’에 “스스로 ‘이인(異人)’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과 그 다름을 끌어안을 수 있는 관용의 힘, 그것이 21세기 문학운동의 새로운 연대성의 근원이 아닐까”라고 썼다. ‘세상에 없는 책’은 그 ‘운동’의 의미 있는 시도로 기억될 책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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