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소야대 위기" 판단…반전 승부수
노무현 대통령이 일반의 예상보다 1년이나 앞서 개헌 문제 공론화 의지를 밝힘으로써 정치권 안팎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직후 “개헌 문제는 2006년께 공론화해서 여론을 수렴한 뒤 2007년에 들어가기 전 논의를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지방선거가 끝난 2006년 하반기부터 개헌이 본격 논의될 것이라는 게 여권 내부의 공공연한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임기 반환점을 돌기도 전에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개편 필요성을 시사했다.
물론 노 대통령이 5일 공개한 ‘한국정치,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글에는 ‘개헌’이라는 표현은 들어 있지 않다. 청와대측도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한 듯 “개헌을 제의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지만, 글의 상당부분이 내각제가 가미된 현행 대통령제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어 개헌과의 연관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노 대통령이 거론한 강원택 숭실대 교수의 저서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에서 대통령과 여소야대 국회의 갈등을 풀기 위한 대안으로 개헌이 필수적인 대통령 결선투표제 등을 제시한 것도 그럴 개연성을 높인다.
노 대통령이 서둘러 개헌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무엇보다 4월 재보선 이후의 정국이 위기라고 봤기 때문이다. 국회가 여대야소에서 여소야대로 바뀐 이후 법안 통과가 제대로 되지 않고 여당은 리더십이 흔들리는 등 혼조를 거듭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여당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내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을 법하다. 결국 지방선거에서 패하면 정치적 동력을 상실해 개헌론을 제기할 기회를 잡지 못할 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위기가 더 심해지기 전에 반전의 승부수를 찾자는 차원에서 개헌론을 제기했다는 얘기다.
여권은 개헌 공론화가 이뤄질 경우 우선 권력구조에 대해 비슷한 입장을 가진 야당 인사들을 연대 세력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 듯 하다. 또 개헌 논의는 현재의 정치 풍토의 문제점에 대한 국민적 이해의 폭을 넓힘으로써 여야 대결 구도를 완화하는 부수적 효과가 기대된다는 게 여권의 시각이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중반부터 개헌 논의가 이뤄질 경우 경제 회복 등 중요한 국정 과제가 뒷전으로 밀릴 것이라는 우려가 상당하다. 개헌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국력이 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먼저 제기하는 것보다는 정치권과 국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먼저 제기되는 게 순리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 한 "또 '힘없는 대통령' 애창곡 불러"
한나라당은 5일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개혁 논의를 공론화하자는 데 대해 “국정실패의 책임을 국민 탓으로 돌리는 투정정치, 원망정치”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한국정치를 비정상으로 만든 장본인이 노 대통령”이라며 “ ‘대통령 노릇 못 해먹겠다’고 해서 국민이 여소야대까지 만들어 주었지만 국민이 받아본 것은 참담한 F학점의 성적표였다”고 비꼬았다. 전 대변인은 이어 “노 대통령은 그 지겨운 ‘힘없는 대통령’이란 애창곡을 또 부르고 있지만, 국민은 두 번 속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연정발언에 이은 정치개혁 공론화 주장의 종착점이 결국 권력구조개편, 즉 개헌일 것으로 보고 예민하게 주시하고 있다. “국정 실패가 여소야대 때문이라는 불안감을 퍼뜨린 뒤 정치구조 변화를 시도, 위기를 탈출하려는 정치적 술수”라는 분석이다.
김영선 최고위원은 “여소야대는 국민의 뜻인데, 민의엔 관심이 없고 수적 우위를 구축, 뭐든지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도다”라고 말했다. 맹형규 정책위의장도 “한나라당의 고립을 유도해 정권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정략적 술책”이라고 가세했다. 유승민 대표 비서실장은 “노 대통령이 야당의 개헌세력을 노렸는지 모르지만 국민은 냉소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도 한나라당 기류와 비슷했다. 유종필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현재로는 대통령 못해 먹겠으니 판을 바꿔보자’는 것”이라며 “과반 의석일 때는 무엇을 하다가 이제 와서 야당과 헌법과 정치풍토 탓을 하느냐”고 반문했다.
반면 국방장관 해임 투표에서 여당과 공조했던 민주노동당은 다른 야당과는 미묘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심상정 수석부대표는 “노 대통령은 연정을 포함한 권력구조 개편의 구체적인 대안을 공식적으로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며 “추상적인 단어만 던지는 선문답은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정치를 야기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심 부대표는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의 계획이 정치발전에 기여한다면 사회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권혁범 기자 hbkwon@hk.co.kr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盧대통령이 공감했다는 강원택 교수 冊 내용은?
노무현 대통령이 문제의식에 공감했다는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의 저서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2005년 5월간)는 선거제도와 정치자금, 정당 및 국회운영 등에 대한 개선방향을 국내외 사례에 대한 실증적 분석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연정 구상과 연관이 있는 것은 3부의 제12장 ‘이원적 정통성의 갈등과 정치안정’에서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국회를 지배하지 못하는 ‘대통령과 국회의 권력 분점현상’을 다룬 대목이다. 열린우리당 의석(146석)이 과반(150석)에 미치지 못하는 현재의 여소야대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강 교수는 “의회와 대통령간 알력을 제도적으로 해결하면서 통치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민주주의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타개책으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야당 의원을 설득하는 미국식 대통령제, 연정이 보장된 내각제, 원내 1당에 조각(組閣)권을 주어 ‘여당 대통령-야당 장관’이 동거하는 프랑스형 대통령제 방식 등을 예시했다. 지난달 여권 11인 모임에서 노 대통령이 “다수당에 각료추천권 부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것도 프랑스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강 교수는 그러나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된 우리 대통령제에선 이런 방법이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며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시기 및 임기 조정, 대통령 결선투표 실시, 국회의 각료 해임권한 폐지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요컨대 대통령 선거와 총선의 승패를 동일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이날 메시지가 ‘개헌 본격 검토’로 해석되는 이유도 이런 방안들이 헌법을 고치지 않고는 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 盧, 서신정치 본격화
노무현 대통령이 요즘 ‘서신(書信) 정치’를 하고 있다. 5일의 서신을 비롯해 열흘도 안돼 3편의 편지를 써서 공개했다.
노 대통령이 그전에도 종종 대국민 서신을 쓴 적이 있으나 당시는 주로 정책, 장관 인사, 외교 문제 등에 대해 견해를 밝혔고 요즘은 국내 정치 현안들에 대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에서 “나라 정치 전체가 어려움에 빠져 있다”며 당정 분리, 차기 대선주자들의 당 복귀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28일에는 ‘국방부장관 해임건의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통해 야당의 해임건의안 제출을 비판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연립정부 방안과 권력구조 문제 등에 대한 공론화 필요성을 거론한 서신을 다시 내놓은 것이다.
서신 정치는 올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2월 18일 ‘전국 공무원에게 보내는 대통령 서신’이 시발점이다. 노 대통령은 그 뒤 이헌재 경제부총리 사퇴 관련 서신을 비롯해 ‘행정수도 건설을 결심하게 된 사연’ ‘한일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 한 달여 동안 무려 5차례나 편지를 썼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이 주요 현안을 충분히 설명하고 정제된 글을 통해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서신을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요한 쟁점에 대해 대통령이 서신 형식을 빌어 일방적으로 의견을 밝히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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