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서 비행기로 반 시간이면 도착하는 세르비아_몬테네그로의 자치주 코소보는 1999년 전쟁 당시에 머물러 있다. 세르비아의 잔학행위에 이은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코소보 비극 현장의 시계는 6년 전에 멎어버렸다.
주도 프리슈티나 공항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은 중무장한 국제평화유지군과 구걸하는 현지인이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도로에서도 전쟁은 진행 중임을 확인할 수 있다. 비교적 잘 닦여진 2차선 도로지만 유엔과 국제 비정부기구(NGO) 차량들만이 오갈 뿐 일반인의 차량은 찾아보기 힘들다.
길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아담한 자줏빛 가옥들은 가까이 가보면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는 폐가다. 전쟁 때 죽은 사람이나 피난지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다. 6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집들은 동공 자리가 텅 빈 흉측한 해골을 닮았다.
30여분 달려 진입한 프리슈티나 도심에서 방문객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다. ‘Welcome to Bill Clinton BLVD’라고 적힌 간판이 말해주듯 프리슈티나에서 가장 큰 이 거리는 빌 클린턴 거리로 불리고 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인을 세르비아로부터 해방시켜 준 은인이 클린턴이라고 생각해서 이름 붙였으리라.
그러나 코소보인들이 클린턴과 미국에 기대했을 미래는 요원한 꿈에 불과하다. 전기 수도 도로 등 기반시설은 물론이고, 생필품조차 유엔과 외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오늘의 코소보다.
이주 문제를 다루는 국가간 인권단체인 국제이주기구(IOM)는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횡행하고 있는 인신매매를 코소보가 직면한 가장 큰 비극으로 꼽았다. 전체 통계는 잡히지 않지만 지난해에만 421명의 피해자가 접수됐다.
이중 순수한 코소보 주민은 53명. 숫자만 보자면 많지 않지만 가족의 명예를 중시하는 코소보 주민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실제 피해자는 수십 배일 것으로 IOM 관계자들은 추정한다. 특히 인신매매가 남편이나 아버지, 사촌 등 가족 내 남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헤라 샤나즈 IOM 조정관은 “피해여성의 상당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들”이라며 “높은 학력 수준에도 불구하고 희생되는 것은 남성들이 주도하는 사회질서, 가부장적 권위주의 가족질서가 원인”이라고 말했다.
남성과 가장의 명령이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의식구조가 인신매매를 더욱 조장하는 요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돈을 받고 딸이나 아내, 여동생을 팔 수 밖에 없는 척박한 경제현실에는 IOM도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코소보의 실업률은 70%를 넘는다. 제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농업이나 광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일부가 도시에서 차량 배터리 장사를 하는 정도다. 취업의지가 있는 사람들 10명 중 7명이 실업자이지만 정부는 여력이 없다. 외국의 원조나 기부금에 재정을 의존하는 형편에서 고용은 아직 멀리 후순위로 밀려있다.
물가는 천정부지다. IOM에서 코소보 발전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스튜어트 맥닐은 “나와 아내가 살던 프리슈티나의 한달 월세가 2년 전에 800유로(100만원)였다”며 “지금은 500유로 수준으로 내렸지만 이 것도 터무니없는 가격”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프리슈티나의 물가는 알바니아, 마케도니아는 물론 세르비아의 웬만한 지역보다도 높다. 전쟁 직후 국제 구호요원들이 밀려 들어오면서 경제여건과 무관한 가격 인플레를 만들어 놓은 탓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가 고향인 맥닐은 “여기가 보스턴보다 비싸다”며 “이런 ‘가짜 경제(false economy)’가 유엔의 부흥작업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2일 프리슈티나 도심에서는 세 건의 폭탄테러가 있었다. 4일 이곳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을 노린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아다닌다. 원인이 무엇이든 여전히 인종간, 정치세력간 테러가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민들은 옛 악몽과 공포가 떠올라 몸을 떨고 있다.
프리슈티나=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 코소보는 어떤 곳
코소보는 민족과 종교문제가 얽힌 국제 분쟁 지역이다.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는 민족의 발상지이자 성지다. 이들은 12세기 세르비아 왕국과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를 이곳에 세웠다.
그러나 14세기 이슬람교도인 오스만 투르크가 세르비아 왕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슬람교도인 알바니아인이 이주해 다수파가 된다. 현재 180만 인구 가운데 알바니아계는 90% 이상이다.
세르비아는 이후 저항을 계속한 끝에 1912년 발칸전쟁을 계기로 지배권을 다시 확보했다. 2차 대전후 유고연방 체제에서 잠잠하던 갈등은 89년 연방이 해체되면서 다시 불거진다.
89년 세르비아 출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연방 대통령이 코소보의 자치권을 빼앗자, 알바니아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코소보는 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98년 세르비아 민병대와 알바니아계 코소보해방군(KLA)이 충돌하자 세르비아군은 KLA 소탕전에 나섰다. 그러자 나토는 78일간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세르비아군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이후 나토와 밀로셰비치 사이에 평화안이 합의돼 코소보 임시행정기구가 발족하고 국제 평화유지군이 진주했다.
2001년 세르비아계 주민까지 참여한 선거에서 온건파인 코소보 민주동맹이 승리, 이브라힘 루고바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올해 말에는 코소보 미래에 대한 세계회의가 예정돼 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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