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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16>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김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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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16>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김태길

입력
2005.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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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 5년동안 한문을 공부했고 초등학교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23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에서 1년반 가르쳤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31년동안 강의를 하였다. 누가 보아도 공부를 많이 한 학자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평생 동안 공부에만 열중한 것은 아니며 놀이에 열중한 세월도 짧지 않다. 서당에서 한 한문 공부는 과거시험용이 아니라 그저 무식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동들의 교재도 서로 다르고 진도도 제각각이었으며, 시험도 성적표도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학년마다 동일한 교과서를 사용했고, 시험을 쳐서 성적도 매겼다. 그러나 5년 동안 한문을 익히고 이미 한문책을 여러 권 배운 뒤라 교실에서 한눈 팔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초등학교 6년을 마치고 5년제 중학 과정인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때는 입학시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과외니 학원이니 하는 것은 없었으며 전과(全科) 참고서 두툼한 것 한 권 사서 옆에 놓고 교과서만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한 그런 시절이었다.

서울로 진학하기에는 집안이 넉넉치 못했으므로 청주고등보통학교로 방향을 정했다. 청주고등보통학교는 충주의 보통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수업시간에 한눈을 팔지 않는 것만으로는 우등생의 대열에 끼일 수 없을 정도로 수재들이 많았다. 다만 나는 우등생이 되겠다는 욕망보다는 건강한 젊은이가 되고픈 생각이 앞섰던 까닭에 등산 수영 줄넘기 역기 등에 열중하였다.

4학년에 진학할 무렵부터 대학 진학 지망생들은 입시 준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예과와 학부를 합해서 6년이 걸리는 대학보다는 3년이면 졸업하는 전문학교만 마치고 취직의 길로 들어서야 할 형편이어서 느긋했다. 그러나 4학년 1학기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하던 중에 일본에는 5년제 중학을 마치고 들어가게 마련인 3년제 ‘고등학교’가 있다는 사실과 그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거기만 들어가면 도쿄(東京)제대, 교토(京都)제대 등 제국대학으로의 진학이 거의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쿄제대에 대한 욕심이 갑자기 생겼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어른들에게 포부를 여쭙고, 만약 고등학교에 합격하면 보내줄 수 있겠는지 상의했다. 그 무렵엔 우리집 형편이 좋아지는 추세였으므로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보내주겠다는 언약을 얻었다.

당시에 일본에는 40여개의 고등학교가 있었으나 그 어느 것도 경성(京城)제대의 예과보다는 들어가기 어렵다는 소문이었다. 그 입학시험 준비를 위하여 나는 아주 딴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다. 밤잠을 안 자고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보다는 정신을 집중하는 길을 택했다. 5학년이 되어 모두가 금강산 수학여행을 떠났을 때는 혼자만 남아서 밀린 공부에 열중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지만 제6고등학교에 지원해서 낙방을 먹었다. 1년동안 재수하여 열심히 준비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자신이 생겼고 목표를 한 단계 높여서 교토에 있는 제3고등학교에 합격하였다.

제3고등학교에서는 학교 공부 열심히 해서 우등생이 되는 것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기풍이 있었고 특히 기숙사생들에게는 그 기품이 강했다. 학교 공부보다는 교양을 위한 독서에 열중하라고 선배들은 권고했고, 산으로 들로 놀러다니는 것과 극장과 다방에도 자주 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생이 되었고 ‘자유료(自由寮)’라는 이름의 그 기숙사에 졸업 때까지 머물러서 ‘놀이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기숙사에서는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기에 어려움이 많음을 생각하고 졸업반인 3학년이 되자마자 그곳을 떠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유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네 같은 사람이 끝까지 남아야 한다”고 말리는 주위의 설득에 밀려서 그대로 주저물러 앉았다.

도쿄제대의 입학시험 과목은 영어와 논문 두 가지 뿐이었다. 공부보다는 놀이에 열중한 탓으로 영어 시험은 엉망으로 치루게 되었다. 다만 고전 독서를 좀 한 것과 운이 따른 덕분에 도쿄대학 법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도쿄대학에 입학한 것은 1943년 가을이어서 태평양 전쟁이 고조에 달할 무렵이었으나 대학의 면학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뜨거웠다. 일본 학생들에게는 전쟁터로 불러내는 영장이 날아오기도 하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교실에는 학생들이 꽉꽉 찼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때 일본인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고, 조선인으로서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날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조선인 대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으로서 일본 군대에 입대하기를 강요하는 압력이 날로 강해졌으며 일본 본토에도 미군 항공기의 폭격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하는 조짐이 보였다.

이름은 ‘학도지원병’이었으나, 인문사회학 계통의 조선인 대학생들은 빠짐없이 지원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일본 정부의 확고한 의도였다. 학도병 지원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서는 고향이 유리하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군의 폭격이 임박한 도쿄에 머물러서 공부에 열중한다는 것도 사실상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충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고 고향에 엎드려서 독학하기 위한 서적을 대량 구입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나의 오산이 컸다. 조선인 고등계 형사는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하여 고향에서도 학도병 지원을 모면할 도리가 없었고, 시골에 엎드려서 구체적 목표도 없는 독학을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도쿄대학을 떠나서 서울대학으로 전입했을 때, 나는 윤리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철학과로 전과하였다. 새로 탄생한 우리 한국을 위하여 가장 절실한 것은 건전한 윤리의식 또는 도덕심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는 도덕적 무정부상태에 가까웠고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리운동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보았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이 전개한 농촌운동을 본받아서 대규모의 청년운동을 실천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청년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신념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느끼고 전공을 바꾸었다.

이 대목에서 또 다시 큰 오산이 있었다. 첫째로 ‘신념체계’라는 것을 철학 공부 몇 해 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고, 둘째로 농경시대에서 소규모의 농촌운동을 했던 것처럼, 좌우(左右)의 갈등이 혹심한 현대 사회에서 대규모의 윤리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더욱더 천진난만한 오산이었다.

나의 생각이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다시 법학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국 윤리학을 계속할 수 밖에 딴 길이 보이지 않았고 본래는 인생설계에 없던 대학교수를 직업으로 삼는 길을 걷게 되었다. 처음에는 철학과가 없는 대학에서 교양철학 또는 교양윤리학을 가르쳤으나 기왕이면 철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전문적 강의를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선진국에 나가서 박사학위를 얻는 것이 첩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진국에서 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4~5년의 세월이 걸려야했고 자비유학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 때는 벌써 내 나이 40을 바라보는데다가 장기 장학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1년짜리 장학금을 얻을 수 있는 경쟁시험에 응하여 겨우 미국으로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 마당이라 박사학위라는 말은 입에도 담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는 1년 뒤에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속으로는 장학금 받는 기간을 연장할 길이 없을까 이중적인 생각을 했다.

장학금 받는 기간을 연장하자면 미국대학에서의 성적이 매우 우수해야 한다. 나는 일본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을 때처럼 또다시 공부에 열중하였다. 목표가 뚜렷했으므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결국 학위를 얻을 때까지 장학금을 연장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것은 윤리학 또는 윤리학적 개념의 논리적 성격을 규명하는 ‘메타윤리학(meta_ethics)이었다. 그리고 귀국한 뒤에도 한동안은 메타윤리학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메타윤리학은 윤리학도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준비과정일 뿐, 그것이 윤리학의 마지막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끝으로는 다시 규범윤리학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규범윤리학의 문제들 가운데서도 ‘삶의 궁극 목적이 무엇이냐’ 또는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의 기본 원리는 무엇이냐’ 하는 따위의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오늘날 한국이 안고 있는 윤리적 문제 또는 현대의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안고 있는 윤리 문제들은 한국인의 가치관 내지 사고방식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다. 따라서 나는 한국인의 가치관 내지 사고방식을 밝히는 연구에 많은 시일을 소비했다. 그리고 현대의 인류가 당면한 큰 문제들에 대한 세계 석학들의 견해를 연구하는 공부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선택한 문제들이었던 까닭에 나는 항상 능동적 자세와 즐거운 마음으로 연구에 열중할 수 있었다.

● 김태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은…

여든이 넘은 현재도 현역인 철학자이다. 학골선풍(鶴骨仙風)의 선비형 외모와는 달리 청년기에는 폭음으로 만성 위염을 앓았는가 하면 배구 등산 수영 등 못하는 스포츠가 없었을 정도로 호방하게 살았다. 도덕적 무정부상태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법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평생 학문의 외길을 가고 있다.

1920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대 법학부에 입학했다가 광복을 맞아 서울대 철학과로 옮겨 졸업했으며 늦깎이 유학으로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연세대 교수를 거쳐 62~86년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정신문화연구원장, KBS이사장을 역임했다. 지금도 테니스로 건강관리를 하면서 일주일에 나흘을 학술원과, 그가 세운 철학문화연구소에 개근하고 있다.

해방직후 법학에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며 고민했던 '어떤 윤리관을 심어주어야 한국인이 서로 어울려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과제이다.

/류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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