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이 얼굴 닮은 친형의 신분증을 내보이고 거액을 환전해 도주했다면 은행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2002년 9월 K사 관리이사로 근무하던 최모(41)씨는 회사로 입금해야 할 3억원의 수표를 빼돌린 뒤 다른 수표로 바꾸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 K씨는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줄 경우 꼬리가 밟힐 수 있다는 생각에 꾀를 냈다. 1년 전부터 몰래 가지고 다니던 친형의 운전면허증을 제시하기로 한 것.
이들 형제는 5살 터울이지만 얼굴이 너무 비슷했다. 1년 전 최씨 자신의 사진과 형의 신분증을 여행사와 구청에 보내 형 명의로 여권을 발급받는 데 성공했을 정도였다.
최씨는 은행 직원에게 형의 운전면허증을 제시하고 수표에 형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었다. 은행 직원들은 돌아가며 운전면허증 위조 여부 등을 살폈으나 최씨와 운전면허증의 사진을 동일 인물로 판단해 수표를 바꿔줬다. 이튿날 최씨는 은행 5군데를 돌아다니며 전액 현금으로 바꾼 뒤 이를 다시 달러로 환전해 해외로 도주했다.
K사는 “운전면허증 사진과 최씨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환전해 준 은행측에 잘못이 있다”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서울고법 민사12부(유원규 부장판사)는 1일 “앞서 여행사와 구청 직원들도 구별하지 못한 점 등을 감안할 때 은행 직원들이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원심대로 원고패소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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