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제의 별궁에 얽힌 권력투쟁의 역사라는 소재만으로도 눈길이 가는데, 웨난(岳南)의 작품이라니. ‘열하의 피서산장’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제법 구미를 당기게 하는 책이다.
때는 강희 13년(1673). 만주족 타도를 표방하며 오삼계(吳三桂)가 일으킨 반란을 돌파하기 위해 강희제(康熙帝)가 꺼내든 카드는 뜻밖에도 열하의 피서산장 건설이었다.
난세의 징후마저 보이던 그때 홀연히 베이징을 떠나 북쪽으로 올라간 강희제는 난하진이라는 곳에 임시거처인 행궁(行宮)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첫 선을 보인 행궁은 청나라 최고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에 90년 동안 건축이 이어지면서 중국 최대의 궁원으로 거듭난다. 전체 면적 564㏊, 담장 길이만 10㎞,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만큼 웅장하고도 자연미가 넘치는 궁궐이다.
고고학 다큐멘터리 작가로 국내에도 적잖은 팬을 갖고 있는 웨난이 열하산장의 위용을 보여주려고 이 책을 쓴 건 아니다. 방어선을 몽골 내지까지 확장한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는 청의 군사 외교 전략, 몰려들기 시작한 서구 세력과의 만남, 특히 황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암투의 장면들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청의 문화 개방이라는 사명을 띠고 피서산장의 만수원(萬樹園)을 방문한 영국의 매카트니에게 건륭제(乾隆帝)가 삼궤구고(머리가 땅에 닿도록 아홉 번 절하는 것)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했으나 한 쪽 무릎만 꿇었다가 미움을 사서 쫓겨나는 장면이 영화롭던 청의 모습이라면, 영불 연합군의 침공에 밀린 함풍제(咸豊帝)가 베이징을 버리고 피서산장을 임시 황궁으로 삼은 뒤 붕어하자 서태후와 대신들이 벌이는 암투극에서는 쇠락해가는 청을 읽을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이 건륭제를 알현한 곳도 이 곳. 연암의 피서산장 평도 등장한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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