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시인의 시적화자에게 삶은 ‘험준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낄낄거려도 아픔이다.” 아프면 어떤가. 쓰든 달든 험준하든 편평하든, 그것이 사랑인 한 자진해서 주저앉을 리 없는 든든한 삶이고 생애다. 그의 6번째 시집 ‘험준한 사랑’은 세상과 삶의 험준함과, 그 속에서 기어코 사랑을 부여잡으려는 정신의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 공간은 서울 강서구 방화동 골목 안 마을이다. 거기에는 “가랑비도, 숨어들어온 빈 병 속의 투명한 햇살”도 있고, 그 빈 병들을 모아 “이렇게 오후의 젖은 햇살을 끌어다가/ 오늘밤 하루 따뜻하게 주무”실 할아버지도 있다.
하지만 그 곳은 “9호선 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힘 좋은 크레인이 마을을 들어올리고 있”는 여느 삶의 공간들처럼 “모터 소리 요란한 마을”이다. 그 이질감에도 화자는 “숨가쁘게 흙을 나르는” 그 “검게 그을은 무쇠의 손길로” “너의 닫힌 가슴을 두드리”고자 한다.(‘빈 병과 크레인과 할아버지와’) “우리는 모두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으니/ 애초 불행이란 없는 것”이라는 막장의 낙관에 근거한 믿음이다.(‘산국’)
시인은 1980년대의 질곡을 20대의 열정으로 헤쳐왔고, 이 혼동과 동요의 세월을 40대의 모호함으로 견디는 세대다. ‘지금도 누군가 사라진다’는 시는 시인이 자신에게, 또 그의 세대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옛날 같으면 벌써 농짝 하나로 뒹굴/ 담장 밖 오동나무 뿌리 깊으나/ 나는 그의 짙푸른 잎과 굵은 팔뚝을 믿을 수가 없다// 내 경험으로/ 혁명을 본 사람은 누구든 회색분자다/ 혁명 뒤에 밀려오는 고요, 지리멸렬/ 방관 속의 죽음…/치운 바람 속에도 숨죽이는 한강물의 깊이를/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여전히 믿고 싶다는 역설임은, 그의 아픈 손목으로 하여 자명하다. “분명 나는 혼자인데/ 한쪽 손목이 아프다/ 한쪽 손목에는 번쩍이는 수갑이 함께 채워져/ 일각을 쉬지 않고 누군가/ 나와 함께 있다”(‘누군가 있다’)
그는 경기 김포에서 세거(世居)해온 토박이로, 그 역시 이런저런 까닭으로 거기 눌러 살아온 시인이다. 어느 늦가을 저녁, 독감으로 며칠째 병치레하던 끝에 시인(혹은 화자)은 산책을 나선다. 들판 한 가운데 서서 그는 돈 벌러 나간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전화기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는 것 아닌가.
대뜸 그는 이민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호주 미국까지 호들갑을 떨며/ 김포 벌판의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아내의 지청구가 오죽했을까.
아내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돌아누워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 몸살 떠나가지 않기를” 빈다. “오늘밤 어느 벌판엔 또/ 사람 그리운 찬바람이 꽃술처럼 스밀까/ 논길 위에 쿨럭이며 더듬거리는 손으로/ 늦은 가을의 전설이나 전하며”(‘몸살’)
시종 찡하고 이따금 짠하고, 낄낄거리다가도 문득 아릿한 그의 시들을 두고 시인은 ‘맵찬 바람과 나눈 귓속말’(‘벽오동’)이라고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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