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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결혼의 변화 상ㆍ하 - 결혼…고독으로 종착하는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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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결혼의 변화 상ㆍ하 - 결혼…고독으로 종착하는 긴 여정

입력
2005.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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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결혼의 황폐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경우에 따라 두렵고 불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그것은 지나쳐온 삶의 스산한 풍경을 되돌아보고, 철철 피 흘리며 벌어진 상처를 응시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면역 부재의 환상에 가해지는 균열의 압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지금 이 혼란의 세기는, 오히려, 결혼과 결혼의 실체를 규정하는 온갖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들을 냉소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부정함에 있어, ‘어떤’이라는 관형어조차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철저히 너덜난 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어떤 경우에 그것은 두렵거나 고통스럽기보다 진부하고 추레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헝가리 출신의 망명작가 산도르 마라이가 그리는 결혼의 풍경, 관계의 풍경은 여전히 신선하고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의 장편소설 ‘결혼의 변화’는 일단 들어서면 돌이키기 힘들도록 빠른 속도의 문체로, 인간 속성의 본질에 육박해 드는 치밀하고 공격적인 표현들로 하여 그 스산한 풍경 속으로 휘감아 들이는 책이다.

아내와 남편, 남편의 옛 여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 자체는 비교적 단순하다. 외견상 평온하던 부부의 관계는, 어느 날 남편의 지갑 속에서 불온한 ‘단서’가 발견되면서 금이 간다.

남편의 마음 속 여자는 다름아닌, 결혼 전 시댁에서 일하던 가정부로 밝혀지면서 부부는 이혼을 하고, 남편은 가정부와 재혼하지만 그 결혼 역시 불행하게 끝나고 만다. 소설은 이들 세 사람 즉, 이혼한 아내와 남편, 가정부가 각각 그들의 친구에게 과거를 떠올리며 독백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같은 ‘시민계급’에 속하지만, 사뭇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 받은 아내가 결혼 초 남편과 섞이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분위기가 달랐다고 할까.

시민계급은 귀족들보다 그런 미묘한 차이에 훨씬 더 민감해. 시민계급은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지만, 귀족은 이미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존재를 입증 받거든.”(상권19쪽) 부부가 감당해야 하는 삶은 표면의 매끄러움이 아니라 그 우둘투둘한 이면이다.

‘완전한 내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이 ‘철저히 비밀을 간직한 낯선 이’임을 깨닫는 일, “사랑하는 이여,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안 되오”라는 선언 같은 한계의 확인, 사랑을 통해 상대방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이기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전한 소유를 희망하고 좌절해가는 아내의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인간이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순화되며 더욱 현명해지고 이해심이 많아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야. 오히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차갑게 냉정해지면서 무관심해진단다.… 침착해지면서 이상하게도 외로워지고 불안해지지.”(상권 72쪽)

모든 감정을 소진한 끝에 아무 것도 원하지 않게 된 얼굴, “거룩한 무관심, 완벽한 외로움, 고통과 기쁨에 대한 무감각”을 “인간의 궁극적인 완전무결함”이라 여기는 남편은 아내에게 “조금 덜 사랑하며 살자”고 제안한다. “나는 눈물을 믿지 않소. 고통은 눈물도 말도 필요 없는 법이오.”(상권 71~95쪽)

작가는 감정에 치우치면서도 현실적인 아내와, 이성적이고 불행하지만 시대의 규율을 외면하지 못하는 남편, 야만에 가까운 원초적 정념으로 세상과 대결하는 가정부, 그리고 이들 세 사람 관계의 증인이자 조언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남편 친구 ‘라자르’의 진술을 통해 결혼 등 관계 보편의 문제를 꼼꼼하게 짚어낸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세상에 둘도 없는 기적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빛만큼 어둠을 지닌 사람들만이 존재할 뿐이야.”(아내)

“인간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네. 없고 말고. 이것을 깨닫고 나면 강인해지고 외로워진다네.”(남편)

“사랑할 권리가 없는 날이 올 거야. 쭈글쭈글한 뱃살, 축 늘어진 젖가슴 아니, 나를 위로할 필요는 없어.”(가정부)

알고도 속는 그 황폐한 풍경은, 이처럼 자신만의 문장 하나를 얻기 위해, 운명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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