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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뜨거운 피의 온도부터 낮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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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뜨거운 피의 온도부터 낮추자

입력
2005.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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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길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길로만 다닌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진다. 그 후에 아무리 더 빠르고 좋은 길을 찾아낸다 해도 이미 엄청난 ‘기득권’을 생산한 길을 포기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가리켜 ‘경로의존(path dependency)’ 현상이라고 한다.

처음에 길을 결정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숱한 비리가 저질러졌다고 해도 그것이 이미 만들어진 길의 효용을 낮추는 건 아니다. 이미 난 길로 사람들이 몰리는 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현상이다. 그걸 도덕적으로 판단하려는 건 어리석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 학벌주의와 대학입시 전쟁, 부동산 투기 등등 한국사회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들은 모두 경로의존 현상과 관련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그 굳어진 경로들을 바꿔보려는 과감한 시도를 했지만, 자주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과오를 범하곤 했다. 영악하고 노회하게 굴어야 할 일을 도덕적 분노를 드러내면서 말을 앞세워 일을 크게 그르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노 정권의 그런 과오에 대해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아마추어에 대한 모독이다. 아마추어(amateur)의 어원은 라틴어 아마토(amator)로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마추어는 돈이 아니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을 하며, 전문적 권위나 승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주로 운동 선수들이 아마추어를 거쳐 프로가 되기 때문에 능력 면에서 아마추어는 열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으나,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아마추어의 정신까지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건 옳지 않다.

노정권은 ‘아마추어 정권’이 아니라 ‘경로의존 정권’이다. 정신과 습속의 세계에도 경로가 있다. 노정권의 정신ㆍ습속 경로는 1980년대에 형성된 ‘제로섬 게임’이다. 80년대의 민주화 투쟁에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승리’ 아니면 ‘패배’ 둘 중의 하나였다. 노 정권 사람들이 그 시절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가상한 측면도 있지만, 그건 국정 운영을 책임져야 할 위치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 정권의 정신ㆍ습속 경로 중의 하나가 구 질서에 대한 분노다. 물론 그건 아름다운 분노다. 그러나 비극은 그것이 자주 정략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매우 열악한 처지에서 거대한 독재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정신ㆍ습속 때문이다.

노 정권은 정략 과잉으로 인해 신뢰를 잃었으며 주요 의사결정 핵심부가 코드 중심의 ‘집단 사고(group thinking)’를 하고 있다는 걸 뼈 저리게 성찰해야 한다.

노 정권이 엄청난 사회문제를 낳고 있는 한국사회의 경로에 도전해 변화를 시도하려고 애쓴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보수세력이 그런 선의마저 인정하지 않고 색깔론을 펴면서 공격하는 건 파렴치한 짓이다.

이제라도 노 정권이 해야 할 일은 한국사회의 경로를 바꾸려 들기 이전에 정권 내부의 경로부터 진지하게 의심해보는 것이다. 정신ㆍ습속 경로는 평소 인지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코드중심의 집단사고 바꿔야

과거의 정신ㆍ습속이 과연 오늘날의 현실에 적합한 것인가? 보수세력이 노 정권 내부의 경로의존 현상을 악의적으로 해석하듯이, 노 정권 역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즉, 한국사회의 고착된 경로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까지 보수세력의 저항이나 방해로 해석해 머리를 쓰기 보다는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가슴의 피만 끓어 오르게 하는 식으로 대응하진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80년대에 전투적인 선언문을 낭독하듯이 매사에 큰소리부터 치고 나가는 ‘선언 정치’부터 자제하면 좋겠다. 그 선의는 이해하지만 불필요한 오해와 반감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를 위해 뜨거운 피의 온도부터 낮추자.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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