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한국과 일본의 두 정상은 제주, 이부스키에 이어 세 번째로 서울에서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이틀 뒤인 6월 22일은 한일협정 체결 40돌이 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며칠만 이목을 집중하면 한일관계의 어제와 오늘이 응축된 한 폭의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40년 전 이맘때 한국과 일본은 해방과 패전 이후의 양국 관계를 새로이 수립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14년을 끌었던 협상 끝에 유상ㆍ무상을 합쳐 5억 달러에 대일 배상은 정리됐고, 이 자금은 경제개발에 투입됐다. 반면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한일병합조약의 원천무효 문제는 유야무야되고 말았고, 대신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권이라는 조항이 삽입됐다.
이런 한일협정의 틀은 이후의 양국관계 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규율하는 원점이 됐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선택은 간단명료한 것이었다. 즉 일본의 강점에서 벗어나 건국된 대한민국의 역사적 출발점보다는 냉전의 현실 하에서 북한과의 체제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을 우선시했다. 이로 인해 ‘친일파’보다는 ‘빨갱이’의 죄가 더 무거워지는 사회적 풍토가 자리를 잡아갔다. 다소 과장하자면 1965년 6월 22일은 친일파에게 사면령이 내려진 날이었다. 일본의 ‘침한파(侵韓派)’가 ‘친한파’가 되는(일본어로는 발음이 같음) 뒤틀린 인식에 힘입어 군사정권은 30년을 이어나갔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이 해체되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었으며, 북한 주민들이 동포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에 민주화의 기운이 그득하게 번져갔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나는 위안부였소’라는 한 할머니의 억눌렸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냉전의 종식과 한국의 민주화는 일본의 미진한 과거사 청산을 우리의 당면과제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일협정에 의해 가동되는 현재의 한일관계와 한국사회의 상황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게 했다.
2005년은 ‘한일 우정의 해’로 명명됐다. 하지만 반년의 족적을 돌이켜보면 ‘한일 갈등의 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독도 문제와 역사교과서 사건이 한일 양국의 불화를 부르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 체결된 한일협정에 있다. 그 점에서 지난 해 말부터 한일협정 관련문서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관계의 블랙박스가 열린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게 한일관계의 틀을 재정립하기 위한 용트림이 시작된 것이다. 최근 친일청산이 한국 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등장한 것도 이런 변화와 공명하는 것이다. 한일 간은 물론이고 한국 내부에서 역사인식을 둘러싼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청산은 공멸이 아니라 상생의 게임이다.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그 해원을 같이 도모하는 일은 새로운 신뢰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좋은 기제로 작용한다. 한국과 일본의 두 정상이 이 역사적인 과업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