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 A씨는 최근 급전이 필요해 대출알선 업체를 찾았다가 낭패를 봤다. 이 업체는 A씨에게 “신용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은행에 적금을 넣어야 대출이 가능하다”면서 “일단 200만원을 통장에 넣으면 1,000만원을 대출해주겠다”고 제의했다.
A씨는 그 말만 믿고 주변 돈을 끌어 모아 200만원을 넣었지만, 해당 업체는 대출을 해주기는커녕 돈만 갖고 사라졌다. 돈을 넣은 통장도 노숙자 명의라 대출알선 업체의 종적을 추적할 길이 없었다. 이른바 ‘대포통장’을 이용한 대출사기에 당한 것이다.
타인 명의 예금통장인 ‘대포통장’의 양도 및 대여 행위를 형사처벌 하는 방안이 추진돼 주목된다. 열린우리당 이근식 의원은 20일 대포통장의 양도ㆍ대여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을 하는 내용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지난달 국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개정안에 따르면 부정한 목적으로 대포통장을 양도ㆍ대여하거나 이를 알선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대포통장은 ‘신용카드 대란’ 이후 카드 돌려막기가 불가능해진 2002년 초부터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인터넷 쇼핑몰 사기사건에 많이 등장하는 등 대출사기 수단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기 유괴 협박 마약판매에까지 악용되는 등 범죄의 핵심수단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현행 법상 대포통장을 판매하다 적발되더라도 “범죄에 쓰이는 줄 몰랐다”고 발뺌 하면 형사처벌 할 근거가 전혀 없다. 때문에 유명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인터넷 뱅킹이 가능한 대포통장은 10만~13만원, 현금카드 기능만 있는 통장은 7만~8만원에 판매되는 실정이다. 대부분 노숙자에게 3만~4만원을 주고 이들 명의로 개설된 통장이다.
개정안이 9월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가 “금융실명법은 실명을 확인하지 않은 금융기관을 처벌하는 법인 만큼, 일반인들 사이의 거래까지 처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 의원측은 “금융실명법 개정이 어려울 경우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에 관한 법률’에 대포통장 처벌조항을 넣어 개정하는 방안도 추진할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밝혔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도 “현재 대출사기, 유사수신행위 등 금융관련 범죄의 90%는 모두 대포통장을 이용하고 있다”며 “대포통장 처벌규정을 만들지 않으면 범죄를 양산하는 구조를 방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법 통과 여부가 주목된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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