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불꽃을 머금은 삼나무 토막들에 물을 끼얹자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얼굴에 흰 점을 잔뜩 그려 넣은 호주 원주민 작가 팬시 누기트는 연기가 홀 안에 골고루 퍼지도록 연신 손을 내저었다. “삼나무 연기는 그림에 들어 있는 정령들이 관객의 몸에 옮겨 붙는 불상사를 막아줍니다. 5만 년 전부터 벽화를 그려온 우리 원주민들의 오랜 믿음이지요.”
16일 프랑스 파리의 호주 대사관에서는 선사시대 동굴 벽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호주 원주민 작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대사관에서 전시회가 열린 것도 이색적이지만 그림 속 정령을 쫓는다는 삼나무 연기를 쐬는 과정 자체가 21세기 파리지앵들에게는 신기함 자체였다.
‘신성한 것들(The Untouchable Ones)’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원주민 작가 30여 명이 그린 40여 점을 선보였다. 작가 대부분은 호주에서도 가장 오지인 북서부 킴벌리에 사는 현지 원주민들이다.
악어, 거북이, 산, 나무, 사람, 캥거루, 오리너구리 등을 흙과 동물 기름 등을 섞은 천연안료로 그린 작품들은 원주민들의 삶의 기록을 그대로 담고 있다. 면과 틀을 벗어나 살아 꿈틀대는 듯한 그림들은 언뜻 추상화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는 같은 부족 사람들끼리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상징과 점, 선을 옛 동굴 벽화 양식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대사관은 홈페이지를 통해 호주 원주민 벽화가 현대 미술로 재탄생한 사연도 소개했다. 1997년 원주민 패디 네와와라와 데이빗 모왈자를라이는 크로마뇽인 시대 프랑스 남부의 라스코 동굴 벽화를 직접 보게 됐다. “마치 프랑스인들의 조상을 직접 만나 생활 방식과 신앙에 대해 듣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현대 프랑스인들은 정작 벽화에서 어떤 이야기도 읽어내지 못하고, 그것을 이야기해 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고향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킴벌리 지역 젊은 원주민들에게 수만 년 동안 내려온 동굴, 바위 벽화를 캔버스에 옮겨 그리도록 독려했고, 젊은이들은 부족의 소망과 믿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오늘날 ‘완지나 벽화 예술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호주 원주민 미술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일로 평가된다.
페넬로프 웬슬리 호주 대사는 “관람객들은 현대 미술과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호주 원주민 미술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그림들은 아득한 시대 동굴 벽화의 세계로 관람객들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회는 9월 2일까지 계속된다.
파리에는 호주 원주민 그림 및 공예품 수천 점을 전시하는 콰이 브랜리 박물관이 내년 초 개관한다.
김명수 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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